■■■ 책 소개
어떤 위로도, 공감도 통하지 않을 때
그저 시간이 해결해주기만을 기다려야 할 때
우리의 그림자는 가장 짙어진다
〈네온사인〉에서 처음으로 소개하는 본격 판타지 작품이자 시리즈 여덟 번째 책으로 김동하 작가의 『그림자가 사라진 정오』가 출간되었다. 작품은 판타지와 미스터리의 경계를 오묘하게 넘나들며 동화처럼 아름다우면서도 흡입력 강한 서사를 자랑한다.
『그림자가 사라진 정오』는 주인공 ‘정오’가 자신의 어두운 기억을 조금씩 마주하는 이야기다. 불현듯 나타난 ‘그림자 상인’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의 그림자를 가져가는 대신 슬픔을 느끼지 않겠다 제안하고, 사고로 기억을 잃은 정오의 앞에도 나타난다. 가장 밝은 빛에 이면에도 그림자는 존재하듯, 작품은 정오를 통해 슬픔과 행복의 필연적 관계를 다양하게 탐색한다. ‘그림자’라는 단어가 지니는 중의적 의미에 집중하면서, 정오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확인한다면 독자에게도 내면에 짙어진 자신의 그림자를 마주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 책 내용
그림자가 사라진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림자’를 갖고 있는 사람
낯선 병실에서 눈을 뜬 정오는 의사로부터 단기 기억상실증을 진단받는다.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느낌도 잠시, 기억을 찾기 위해 만난 친구는 더욱 충격적인 소식을 전한다. 사람들이 그림자를 사라지기 시작했다는 소식. 처음에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친구의 말을 부정한다. 그러나 두 눈으로 확인한 현실은 정오의 부정을 가볍게 무시한다. 친구를 포함한 대다수의 그림자가 이미 사라졌고, 심지어 그들은 자진해서 그림자를 누군가에게 넘겼다고 한다. 그럼 그 대가로 얻는 것은 과연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아무런 대가 없이 자신의 그림자를 넘길 리는 없으니까.
“슬픔을 없애줘.” (21쪽)
한순간에 그림자를 갖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된 정오는 자신의 슬펐던 순간을 떠올리려 하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러다 갑자기 정오에게 예상치 못한 슬픔이 몰려오고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던, 소문 속의 ‘그림자 상인’이 마침내 정오의 눈앞에 나타난다.
“정오 씨, 제게 그림자를 파시겠습니까? 동의하신다면 지금 느끼는 슬픔을 비롯해 앞으로 그 어떤 슬픔도 느끼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34쪽)
정오가 갖고 있는 것은 두 가지 의미의 그림자다. 말 그대로 빛이 통과하지 못해 생긴 그늘이라는 의미의 그림자와 내면 깊이 존재하는 슬픔이 겉으로 드러난 어둠이라는 의미 모두 정오가 가진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정오의 그림자를 탐내는 의문의 상인. 과연 정오의 그림자는 정오에게 어떤 결말을 가져다줄까.
우리에게 어둠은 과연
쓸모없는 것일까 하는 질문
『그림자가 사라진 정오』는 그림자와 슬픔을 거래한다는 흥미로운 소재로 우리에 뜻밖의 질문을 던진다. ‘당신이라면 슬픔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림자를 팔 것인가?’ 하는 질문 말이다. 물론 이는 작가의 세심한 관찰과 경험적인 고찰에서 비롯된 질문이겠지만, 크고 작은 슬픔을 느끼며 사는 우리에게 언젠가 한 번쯤 점검해봐야 할 문제라는 점에서 이 질문이 갖는 울림은 매우 크다. 과연 나는 그림자를 팔 것인가? 과연 슬픔은 내게 그만큼 쓸모없는 감정에 불과한가?
그저 이따금 일렁이는 멀미 같은 감정만이 자신을 자각하는 수단이었다. 시간에 갇힌 기억 없는 감정은 송진처럼 끈적하게 그를 괴롭혔고 이제 그는 어떻게든 이 끝없는 고통의 출렁임이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게 비록 완전한 죽음일지라도. (105쪽)
사실 『그림자가 사라진 정오』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품 속에서 정오를 포함한 대다수의 인물은 같은 결론을 내린다. 슬픔을 가져가주는 대가로 그림자를 파는 것. 그리고 대개 독자들 역시 같은 생각일 것이다. 지독하고 끈질긴 슬픔에 시달려본 사람들은 안다. 슬픔에서 벗어나는 일이 자신의 뜻대로 되지도 원하는 시기에 이뤄지지도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슬픔을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는 누구도 알지 못한다. 만일 현실에 이런 거래가 성행했다면 작품에서 드러나는 결과보다 더욱 끔찍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만큼 슬픔이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바가 많기 때문이다. 정오의 선택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조금씩 변한다. 처음에는 모두와 같은 결론을 내리지만 끝에는 정오가 어떤 결말을 맞게 될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를 바란다. 그리고 결말을 확인하고 나서 이런 깨달음을 얻었으면 한다. 아직 그림자가 있는 당신에게는 곧 빛이 다가오리라는 것을. 짙은 어둠이 밝은 빛의 가장 정확한 신호라는 것을.
■■■ 지은이
김동하
2012년 광주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그림자가 사라진 정오』 『달고나 여행사』 『한산: 태동하는 반격』 『독대』 『피아노가 울리면』 『운석 사냥꾼』이 있다.
■■■ 차례
기억을 잃다
그림자 상인
소품 상점 달섬
그림자 거래의 진실
슬픔 버튼
환생인
희망의 별자리
봉인된 카이로스
너희가 슬퍼야 하는 이유
살아야지
그날 우리는
그림자가 사라진 정오
작가의 말
■■■ 책 속에서
“너 진짜 모르는구나?”
“자꾸 무슨 소리야?”
“그게 아니라 진짜로 사람들 그림자가 사라지고 있다니까.”
박하연이 답답하다는 듯 핸드폰으로 뭔가를 검색하더니 정오에게 보여주었다. 뉴스 기사였다.
일파만파, 걷잡을 수 없는 그림자 실종 (19쪽)
맑고 따뜻한 목소리였으나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다. 정오는 남자가 내민 손을 잡는 대신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봤다. 곧 그 기시감의 이유를 깨달았다. 남자의 머리카락 색에서 박하연이 만났다던 그림자 상인에 대한 묘사가 떠오른 것이다.
“혹시 그림자 상인인가요?”
“따로 제 소개를 할 필요는 없겠네요.” (33~34쪽)
로혼의 대답은 불길한 예감을 현실로 바꿔놓았다. 로혼이 말한 재앙의 때가 곧 임박했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정오가 느낀 위기감은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이었다. 정오가 아는, 그것도 아주 가까운 사람 중 하백과 만났지만 그림자를 팔지 않은 사람이 떠올랐다. (64쪽)
“그렇다면 이번엔 조금 다른 질문을 드려도 될까요?”
전태진은 피곤함을 느꼈으나 청년의 간곡한 태도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선생님 앞에 선생님이 느끼셨던 슬픔을 다른 사람들도 느낄 수 있게 하는, 이를테면 슬픔 버튼이 있다면 누르실 건가요?”
질문을 던진 청년은 다소 긴장한 얼굴로 전태진의 대답을 기다렸다. 전태진은 순간적으로 물론이라고 답할 뻔했다. (92~93쪽)
“방법은 간단해요. 별이 지문을 가진 정오 씨가 태진 형님의 이야기를 타이핑하면 됩니다. 형님 이야기가 적힌 용지가 별의 불꽃을 피우는 불쏘시개가 되는 거죠.”
로훈의 말을 들은 전태진은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다. 연신 마른침을 삼키는지 목울대가 꿀렁거렸고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전태진이 무겁게 입술을 뗐다.
“역시 가장 슬펐던 기억을 말해야 하는 거겠죠?”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126쪽)
침대에 모로 누운 정오의 눈에 침대 옆 협탁에 놓인 모래시계들이 보였다. 제각각 다른 크기의 모래시계였다. 정오가 제 삶을 엄격하게 통제하기 위해 사용했던 모래시계들은 이제 쓸모를 잃은 고물처럼 보였다. (157쪽)
하백이 로혼을 보며 씁쓸하게 말했다.
“갑자기 궁금해지네. 네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도 지금처럼 말할 수 있을지.”
“내가 어떻게 죽었는지 안다는 거야?”
하백이 비열하게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원한다면 들려줄 수도 있어.” (177쪽)
전태진은 정오를 데리고 부두 쪽으로 이동했다. 그러다 막다른 길인 붉은 등대에 이르렀다. 정오의 눈은 파란 바다를 보고 있었지만, 머릿속에는 여전히 무너진 건물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 아래 하이철과 조우빈이 깔려 있었다고 생각하니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로웠다. 자신 때문에 온 여행에서 자신만 살아남았다.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20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