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 소개
가야 한다, 찾아야 한다, 지켜야 한다!
세상이 망해도 포기할 수 없는 것,
가족 그리고 덕후의 외장하드!
미스터리, 스릴러, 판타지, 로맨스 등 특정 장르에 국한되지 않고 전방위적인 스토리텔링을 선보이며 독자들의 사랑받고 있는 작가 강지영. 그의 장편소설 『어두운 숲속의 서커스』가 네오픽션 ON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작품은 아포칼립스 한복판에서 펼쳐지는 가장 인간적인 가족 원정기로, 강지영이 펼쳐놓은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무대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한 가족의 이야기다. “신이든 뭐든 상관없어. 마지막까지 룰 따윈 없애 주겠어.”라며 큰소리치고 집을 떠난 이들. 과연 이 가족은 각자가 향하는 목적지에 무사히 닿을 수 있을까?
신종 바이러스의 출현,
아비규환 속에서도 믿을 건 가족뿐!
코로나19 팬데믹이 종료된 지 불과 3년 만에 또 하나의 신종 바이러스가 출현했다. 극동아시아, 그중에서도 중국과 한국에서만 발병한 이 감기는 Far East influenza virus, 이른바 페인플루라 불리며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감염 의심자들이 마구잡이로 격리되고 확진되면 살처분된다는 흉흉한 소문마저 도는 가운데, 정부는 여전히 대책이 없었다. 아니, 일부러 방치하는지도 몰랐다.
기온이 35도가 넘는 이상고온현상이 이어지면서 심각한 페인플루 후유증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뜨거워진 뇌가 부패하기 시작하자 감염자들은 정신 줄을 놓고 이웃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초과가 눈을 돌려 집 앞을 내려다봤다. 초저녁부터 뒤엉켜 있던 두 노인은 여전히 서로를 끌어안은 채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좌빨 좀비를 척결하자”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달라진 게 있다면, 최 집사의 러닝셔츠가 붉게 물들었다는 정도. 주찬 할아버지의 입에서 피 묻은 살점 한 조각이 툭 떨어졌다.
“엄마, 현관문 잘 잠겼나 확인해.”
초과가 황급히 창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내렸다.
“왜 그래, 무섭게.”
초과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현관으로 뛰어가는 숙영에게 차마 주찬 할아버지가 최 집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단 말은 하지 못했다. _본문 중에서
감염자들이 좀비화되자 정부는 외부 출입을 금지했다. 하지만 삶이 어떻게 한순간에 중단된단 말인가.
좀비가 창궐해도 산모는 아기를 낳아야 하고,
오타쿠는 코믹페스티벌에 가야 한다.
좀비가 창궐해도 우리에겐 반드시 책임져야 할 일이 있고, 가야 할 곳이 생기며, 끝내 지켜야 할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어두운 숲속의 서커스』 속 가족도 마찬가지이다.
이 집의 막내 초과는 자신의 희귀혈액형을 물려준 딸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미국에 있는 생부에게 떠나보내야만 했다.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에서 딸의 입국 소식과 수술 소식을 들은 초과는 썸남의 오토바이 뒷자리에 매달려 수혈 원정을 떠난다. 집안의 장남 근대는 “덕후는 절대 죽지 않으니까. 우리한텐 다음 주에 나올 애니, 다음 분기에 출시될 신작이 기다리고 있거든.”이라는 명언을 남기며 코믹페스티벌이 열리는 AT센터로 향하고, 이들을 키운 엄마 숙영은 만삭의 큰딸 초희를 오토바이에 태워 서울의 대학병원을 찾아 나서는데…….
산부인과가 있는 건물들은 모두 셔터가 내려졌거나 감염자들이 에워싼 상태였다. 길바닥에서 애를 낳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 우리 이제 어디로 가?”
숙영의 등에 붙어 매미처럼 울던 초희가 흐느끼며 물었다.
“우리 서울 가자. 늬 오빠랑 초과도 서울 간댔어. 너도 지성대학병원 가서 낳고 싶댔잖아.” _본문 중에서
숙영의 가족들은 대환장의 혼란 속에서도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을, 눈앞에 벌어진 일을 묵묵히―라고 하기엔 꽤 시끌벅적하지만― 해결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팬데믹이 휩쓸고 간 자리,
무너지는 세계를 지탱하는 것들
현실에서도 그렇듯 『어두운 숲속의 서커스』 속 정부도 신종 바이러스 출현 초기에는 이렇다 할 대책을 내놓지 않는다. 그러다 상황이 심각해지고 사람들이 좀비화되기 시작하자 뒤늦게 확산을 방지한다며 감염 의심자를 마구잡이로 격리하고 좀비로 변이한 사람들을 살처분한다.
정부의 폭력적인 방침으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힘없고 약한 보통 사람들에게 돌아온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무너지는 세계를 지탱하는 것 역시 슈퍼히어로가 아닌 보통 사람들이다. 자식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한 엄마,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몸을 시험체로 내놓았던 아버지, 좋아하는 사람들과 하고 싶은 일을 하고자 했던 오타쿠들, 죽음과 상실을 끌어안은 채 계속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을 토닥이는 것 역시 그런 사람들이다.
일요일 아침 엄마의 도마 소리처럼 두 사람이 토닥거리는 소음이 근대의 마음을 푸근하게 다독거렸다. 멀리서 백신 개발 소식을 알리는 안내 방송과 사이렌 소리, 가족을 찾는 사람들의 함성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통곡, 가족을 되찾은 사람들의 환호가 거리를 메웠다. 이름 없는 피해자들과 이름을 숨긴 가해자들의 전쟁이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근대는 유이를 내려놓고 다시 운동화 끈을 묶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려면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 페인플루보다 더 지독한 그 무엇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_본문 중에서
『어두운 숲속의 서커스』는 강력한 스토리텔링으로 독자를 쥐락펴락하는 작가 강지영이 새롭게 선보인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의 소설이다. 전통적인 좀비 소설의 문법과 비교하자면 이 작품은 정통 좀비 소설의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 하지만 작품 전반에 흐르는 모성애와 가족애 그리고 오타쿠라는 소재가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무대를 그 어떤 좀비 소설보다 더 탄탄하게 지탱하고 있다. 마치 팬데믹이 휩쓸고 간 자리에 울려 퍼지는 사람들의 환호처럼 말이다.
네오픽션 ‘ON 시리즈’는
호러, 미스터리, 판타지, SF 등 ‘읽는 즐거움’으로 가득한 다채로운 소설을 소개합니다.
허구 속 재미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현실과 사회의 빛과 어둠을 담아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복기합니다.
■■■ 지은이
강지영
장편소설 『신문물검역소』 『심여사는 킬러』 『엘자의 하인』 『하품은 맛있다』 『프랑켄슈타인 가족』 『페로몬 부티크』 『살인자의 쇼핑몰1, 2, 3』 『굿 드라이버』 『죽지 않고 어른이 되는 법』 『인간보다 인간적인』 『거의 황홀한 순간』 『기린 위의 가마괴』 『양의 실수』, 소설집 『굿바이 파라다이스』 『개들이 식사할 시간』 『살인자의 쇼핑목록』을 출간했다.
■■■ 목차
어두운 숲속의 서커스
작가의 말
■■■ 작가의 말
『어두운 숲속의 서커스』 속 초과 가족들도 과거를 후회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내 앞에 벌어진 일을 묵묵히 해결해 나가는 사람들이다. 각자의 본능과 본성에 충실하며, 대혼란 속에서도 스스로 앞가림을 한다. 전통적인 좀비 소설의 문법대로면, 좀비보다 광기에 사로잡힌 생존자들이 더 골치여야 한다. 그런 면에서 『어두운 숲속의 서커스』는 정통 문법을 따르지 않았다. 서사를 이끌어 가는 초과 가족은 저마다 잘못된 선택으로 비루한 현재를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하지만 아포칼립스를 통해 비로소 생기를 되찾고, 꺼졌던 욕망을 추동해 한 뼘씩 성장해 나간다. 엄마 숙영이 만든 가풍이 그 원동력일 것이다.
― 「작가의 말」 중에서
■■■ 책 속에서
초과가 소설과 머리끄덩이를 잡고 싸우는 동안, 정작 치명타를 입은 건 세상이었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종료된 지 불과 3년 만에 새로운 유행병이 기승이었다. 곳곳에 휴교령이 내려지고 임시 휴업이나 폐업을 결정한 상점들이 늘어갔다. 극동 아시아, 그중에서도 중국과 한국에서만 발병한 이 감기는 Far East influenza virus, 페인플루라 불리며 사람들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치사율이 높아서는 아니었다. 페인플루로 인한 사망자는 없었지만 완치 판정을 받은 사람 또한 없었다. 면역력이 약해지면 재발하는 탓에 가족이 여럿인 집은 마치 돌림노래 부르듯 끊임없이 페인플루를 앓고 또 앓아야 했다.
_8쪽
“저기 큰길에 전경 버스가 두 대나 있어. 어머, 야, 저이들 곤봉으로 사람 대가리 후려치는 거 아니야?”
초과가 손갓을 만들어 쓰고 숙영의 옆에 섰다. 엄마의 말대로 중무장한 전경 여남은 명이 중년 남자 한 명을 에워싼 채 곤봉을 휘두르고 있었다.
“저게 무슨 일이야?”
“나도 잘 몰라. 아까 잠이 덧들어서 YTN을 틀었는데 어제 기온이 35도 넘어서면서부터 심각한 페인플루 후유증이 발생했대. 당장 오늘부터 집 밖에 나오지 말란다. 외출했던 가족이 찾아와도 절대 문을 열어 주면 안 된다고 하더라.”
곤봉에 두들겨 맞은 중년 남자는 취객처럼 휘청거리다 느릿느릿 차도로 도망쳤다. 달려오던 덤프트럭 한 대가 중년 남자를 치고 요란한 굉음과 함께 급정거했다. 고무 탄내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공중으로 붕 떴다 고꾸라진 중년 남자의 두부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져 도로를 적셨다.
초과가 눈을 돌려 집 앞을 내려다봤다. 초저녁부터 뒤엉켜 있던 두 노인은 여전히 서로를 끌어안은 채 “예수천국 불신지옥”과 “좌빨 좀비를 척결하자”는 소리를 중얼거렸다. 달라진 게 있다면, 최 집사의 러닝셔츠가 붉게 물들었다는 정도. 주찬 할아버지의 입에서 피 묻은 살점 한 조각이 툭 떨어졌다.
“엄마, 현관문 잘 잠겼나 확인해.”
초과가 황급히 창문을 닫고 잠금장치를 내렸다.
“왜 그래, 무섭게.”
초과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현관으로 뛰어가는 숙영에게 차마 주찬 할아버지가 최 집사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단 말은 하지 못했다.
_43~44쪽
근대의 침대에 몸을 옹송그리고 앉아 윤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량이 많은지 신호가 한참 만에야 떨어졌다.
“좀 와 줬으면 좋겠어.”
“필요한 건요?”
윤재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가볍고 사근사근했다.
“오토바이 좀 빌려줘. 오토바이 타는 법도. 나 서울, 지성대학병원에 갈 일이 생겼어.”
숙영에겐 데리러 올 사람이 있다고 했지만 윤재까지 위험에 빠트릴 수는 없었다.
“지성대병원? 거긴 왜요?”
“딸이 그 병원에 있어. 내 피가 필요하대.”
송화기 너머로 윤재의 고른 날숨과 들숨이 들렸다.
“에이, 뭐 하러 오토바이를 배워요. 같이 가면 되지.”
윤재는 뭔가를 질겅질겅 씹으며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너 너무 쉽게 말하는 거 아니야? 바깥 상황 잘 안다며. 나 목숨 걸고 나가는 거야. 이거 시뮬레이션 게임 아니라고.”
_68쪽
“꼬맹이 말이죠? 애 아빠가 본인이 감염자라고 신고했대요. 가 보니까 아빠는 벌써 좀비가 돼서 날뛰고 꼬맹이는 장롱에 숨어 있었나 봐요. 애 앞에서 차마 못 할 짓이지만, 우리라고 용빼는 재주 있습니까. 아빠가 원체 거구에 기운이 좋아서 소음기 꽂고 아주 벌집을 만들었답디다. 저 안 젤 구석탱이에 퍼진 아저씨가 애 아빠예요. 나오려고 보니까 저 꼬맹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패악을 떨더랍니다. 나중에 대가리들 바뀌고 나서 쟤가 이상한 증언이라도 하면 옷 벗는 사람이 한둘도 아닌데, 난감했을 겁니다. 이마 만져 보니 따끈한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았다는데 핑계 김에 실었대요.”
_102쪽
“처음엔 저도 음모론이라고 생각했어요. 코로나19 때도 그런 루머가 있긴 했으니까. 그런데 이번엔 정말 확실해요. 저 데이트레이더거든요. 매일 주식 동향 분석해서 사고파는 일개미요. 믿는 사람도 있고 코웃음 치는 사람도 있지만 증권가 받글 이라는 게 아주 없는 말을 지어내진 않거든요. 근데 지난주 홍콩발 받글에서 곧 동아시아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창궐할 거고, 감염자가 천만 명에 도달할 때쯤 치료약이 풀릴 거라고 했어요. 테마주로 미국 에버라이프사와 스웨덴 마르고, 우리나라 조이캡이 떠올랐죠. 에버라이프는 분사식 주사기 생산업체고, 마르고는 듣보잡 제약회사, 아시다시피 조이캡은 사설 경비업체고요. 뭔가 그럴싸하지 않나요?”
_120쪽
약간의 설렘과 두려움을 안고 시험 장소에 도착한 나는 무균실에서 일주일간 하루 한 번씩 링거를 통해 약물을 투여받았다. 일상은 단조롭지만 엄격한 규칙에 따라야 했다. 매일 아침 7시면 침대 옆 비닐 커튼 너머에서 라텍스 장갑을 낀 누군가의 손이 들어와 링거를 주사하고 은박지에 싼 식사와 한 주먹의 약을 놓고 갔다. 고온의 스팀으로 멸균한 듯 퍼석퍼석한 밥과 채소볶음, 간 없이 푹 쪄 낸 돼지고기 따위와 고열량 수프를 모두 먹고 나면 소독제가 섞인 물로 샤워를 하고 약을 먹었다. 점심 무렵엔 채혈 후 체온을 재고, 혈액 수치가 불안정할 경우엔 약물이 추가로 주입되거나 혈소판 수혈을 받기도 했다. 체온은 항상 40도 안팎, 숨이 가쁘고 무기력한 컨디션이었다. 커튼 밖에서 한국어와 중국어로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지만 좀처럼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_142쪽
“그래, 같아. 그치만 나랑 내 새끼는 죽더라도 인간으로 죽을 거야. 밖에 우글거리는 저 괴물들이나 당신들이나 다를 게 뭐야. 대구빡에 구멍 뚫리기 싫으면 옆으로 물러나.”
숙영이 사내에게 총을 겨눈 채로 초희의 손을 끌어당겼다. 아플 정도로 강한 힘이었다. 터널증후군으로 성치 않은 엄마의 손목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 딸은 의아하기만 했다. 둘은 사내를 중심으로 천천히 반원을 그리며 걸음을 옮겨 현관을 나왔다. 그러고는 형래가 흘린 핏자국 위를 내달렸다. 텅 빈 집에 홀로 남은 사내가 숙영이 웅크리고 있던 싱크대 앞에 엉덩이를 붙였다. 담배 한 대를 입에 물자 쿨럭쿨럭 기침이 터졌다. 아침 내내 미열이 감돌았던 이마가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사내는 인간으로 죽긴 글렀군, 혼잣말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_162쪽
“제가 좀비가 되면 책임져 줄 거란 말이죠?”
근대가 지저벨을 엔젤비트의 등에 업혀 주었다. 끅끅, 울음을 삼키며 타라가 차에서 내려 트렁크를 열었다. 그녀는 채 조립이 끝나지 않은 플라모델들과 지저벨이 가장 좋아하는 모빌슈트 AGE-1 완제품을 옆으로 가지런히 밀어냈다. 엔젤비트가 지저벨을 트렁크에 뉘었다. 근대는 지저벨의 흐트러진 넥타이를 고쳐 매고, 제복 앞단추를 잠가 주었다. 타라가 눈물을 닦고 지저벨의 창백한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감겼던 그의 눈이 사뿐 뜨이며 굳어 가던 뺨이 강하게 실룩거렸다. 곧이어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 지저벨의 조잡한 치열이 환하게 드러났다. 변이가 시작된 터였다.
_20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