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 소개
찬란한 꿈, 변질된 꿈, 파괴된 꿈
그리고 여전히 우리의 손에 남아 있는
지연된 꿈에 대하여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의 서른세 번째 안내서. “아름답고 우아하면서도 냉정한 결기로 반짝인다”라는 평을 받으며 제12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거머쥔 전하영이 ‘트리플’ 시리즈를 만나 새로운 소설집 『시그투나』로 독자들을 찾아왔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이야기’가 무엇인지 묻고 있는 세 편의 소설은 작가 전하영이 은밀하게 수행 중인 약속 같기도 하다. “더는 예술에 아무런 힘도 남아 있지 않다고 체념하거나 예술은 속된 것으로 전락했다고 냉소하는 대신, 예술이 감행할 수 있는 시대착오를 통해 오래된 맹약을 유지”하려는(이소 문학평론가) 전하영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독자들에게도 가닿기를 바란다.
미래를, 그리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
여성 지식인 최영숙의 꿈과 투쟁에 관한 이야기
첫 번째 소설 「시그투나」는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 유럽으로 건너간 최영숙의 눈으로 억압과 자유, 고립과 연대를 교차시킨다. 1927년 스웨덴의 고요한 마을 시그투나. 이 작은 마을에 거주하는 조선인이라곤 그녀 한 사람뿐이다. 멜라렌 호수의 찬란한 빛과 한여름의 향연 속에서도 그녀의 기억은 늘 조국으로 되돌아간다. 3·1운동의 거리로, 서대문형무소의 차가운 벽으로, 그리고 동지들의 죽음을 목격한 순간으로.
내가 경험한 수치를, 끝없는 절망을 이토록 평화로운 스웨덴의 사람들에게 밝힐 수 있을까요? 1919년 3월의 일을 그들은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요? 그게 상상이 아니라 진짜로 벌어진 일이고, 여전히 계속된다는 것을, 더 심해진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요? 나는 잊을 수 없습니다. 절대로 잊지 못합니다. _본문 25쪽
최영숙은 새로운 언어를 익히고 글을 쓰면서, 동급생 리사와 대화하면서 낯선 자유의 공기를 마신다. 하지만 동시에 멀리 떨어진 조국의 아픔을 증언해야 한다는 사명 또한 짊어진다. 그녀의 글은 단지 일기의 조각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절규이자 미래 세대를 향한 편지로 읽힌다.
청춘과 함께 사라진 열정과 순수
그 극적이고 서글픈 쇠락
두 번째 소설 「인도차이나」는 사십 대 소설가인 ‘나’와 영화 제작자인 ‘R’이 북토크에 참석하기 위해 소도시의 서점으로 향하며 펼쳐지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다.
젊고 유망했던 청년 예술가였던 ‘나’는 이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흔하디흔한 예술계의 노동자가 되었다. 한때는 순수한 열정과 재능을 오롯이 쏟아부었던 무언가가 있었던 것 같지만, 지금은 그저 생계 수단이 되어버린 일에 피로만이 남았을 뿐이다.
“웃기지 마. 그때 정말 자기가 어리다고 생각했어? 난 아닌데? 난 책도 썼잖아. 이십 년 전에는 지금보다 더 잘 썼는지도 몰라. 그때는 지금처럼 마른걸레 쥐어짜듯 억지로 쓰지 않았다고. 오히려 생각이 흘러넘쳐서 그걸 다 담을 수 없는 정도였지. 당신도 그렇잖아. 내가 요즘 쓰는 것보다 예전에 쓴 걸 더 좋아하지 않아?”
의도치 않게 흘러나온 자기 고백적인 말에 나는 움찔했다. 내 속에 나도 모르게 뒤틀려져 있던 부분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퇴보하고 있지 않나? 무언가 순수한 불꽃을 잃고 시시껄렁한 껍데기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_본문 61쪽
‘나’는 여정을 통해 소설가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여성,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 나이 들어가는 자신을 마주한다. ‘R’과의 관계는 애정과 갈등, 친밀함과 균열을 동시에 보여주며, ‘나’는 그 속에서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작품은 삶과 관계의 불안정성, 예술가로서의 자기 회의, 나이 듦의 체감, 그리고 일상 속에서 스치는 장소와 순간들이 남기는 잔상을 날카롭고도 섬세한 문장으로 포착한다.
“민망한 향수조차 없이 잔인했던 좌절의 기억”
조용히 긴 파문을 남긴 상처의 잔해
세 번째 소설 「조용하고 먼」은 과거 대학 시절의 사건을 매개로 다시 얽히게 된 두 인물―윤경과 승혜―의 통화를 중심으로 전개된다. 졸업작품 과정에서 벌어진 표절 사건은 두 사람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고, 20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현재를 규정한다.
승혜는 자신의 아이가 윤경과 같은 잘못(표절)을 저질렀다며 과거의 이야기를 다시 불러온다. 두 사람은 서로의 기억과 상처, 억울함과 후회를 되짚으며 누구의 잘못인가 하는 질문을 끝없이 주고받지만, 결국은 인생을 무겁게 짓누르는 죄책감, 속죄 그리고 끝내 해소되지 않는 갈등을 드러낸다.
내가 그 작품을 안다고 얘기했을 때, 그때 봤던 너의 표정을 절대로 잊을 수 없을 거야. 그런 장면은 평생 잊을 수가 없지.
…….
너는 부인했어. 너는 모른다고 되풀이해서 말했어. 지금도 그렇게 얘기할 수 있니?
이미 다 인정했잖아. 합당한 처벌도 받았으니까 다 끝난 얘기야.
넌 정말 가벼워졌구나.
아니, 나는 사라지고 싶었어. 아주 오랫동안. 죽은 듯이 지냈어. 그게 지금의 나야. _본문 118-119쪽
소설은 두 인물의 대화를 통해 과거의 그림자와 현재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보여준다. 작가는 인간관계의 균열, 예술가의 윤리 그리고 세대를 이어 반복되는 실수를 섬세한 시각으로 탐구하여 조용하지만 멀리까지 파문을 남기는 이야기로 그려내고 싶었던 건 아닐까.
■■■ 지은이
전하영
2019년 문학동네신인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제12회 젊은작가상 대상을 수상했다. 소설집 『시차와 시대착오』를 썼고 앤솔러지 『봄이 오면 녹는』 등에 참여했다.
■■■ 차례
시그투나
인도차이나
조용하고 먼
에세이_ 어느 계절에
해설_ 여전히 남아 있는 것들_ 이소 문학평론가
■■■ 작가의 말
사랑. 내가 최영숙에 관해 읽고 쓰는 동안 가장 많이 떠오른 단어는 의외로 사랑이었다. 최영숙은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고 그만큼 큰 사랑을 품은 사람이었다. 그가 간절히 만나기를 바랐던 다음 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조금이나마 그 사랑을 최영숙에게 돌려주고 싶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해 실은 조금씩 최영숙에게 빚을 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통해 증명하고 열어젖히고자 했던 그 작은 미래의 틈 속으로, 비로소 손을 비집어 넣어 다음 세계가 더 가까워졌을 것임으로. 우리가 꿈꾸는 더 밝은 세계로.
― 에세이 「어느 계절에」 중에서
■■■ 추천평
작가 전하영은 “은밀한 약속”을 수행 중인 셈이다. 약속에 충실한 작가는 과거의 꿈을 현재로 불러와 다시 미래로 이어 붙인다. 더는 예술에 아무런 힘도 남지 않았다고 체념하거나 이제 예술은 속된 것으로 전락했다고 냉소하는 대신, 예술이 감행할 수 있는 시대착오를 통해 과거의 사람들과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오래된 맹약을 유지한다.
― 이소 문학평론가
■■■ 책 속에서
기나긴 겨울밤에, 그녀는 많이 울었다. 몰래, 매일, 혼자서. 그러다 문득 혼자 우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러운 일인지를 깨달았다. _「시그투나」 중에서
며칠 밤이 걸리는 거리만 큼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유럽 대륙 곳곳에는 그녀 외에도 다른 조선 사람들이, 그녀처럼 지식을 쌓기 위해, 힘을 기르기 위해, 보이지 않지만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갖기 위해, 이국의 땅을 찾아와 고독하게 지낸다는 소식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었다. 그중에는 상하이에서 만났던 흥사단 동지들도 있었다. 그들 각자는 나름의 목표와 사명을 갖고 그곳에 다다랐다. 동지들이 저마다 마주할 쓸쓸함을 상상하자 더없이 가슴이 저며온다. 그녀는 그들을 만나지 못한다.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그것은 결심에 가까운 고립이었다. _「시그투나」 중에서
자유.
그들이 의식조차 하지 않으면서 단단히 소유하고 있는 듯한 그 자유로움의 상태. 독립의 상태. 너와 내가 동등한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굳은 믿음. 그로부터 비롯되는 서로 간의 적당한 거리감. 여유. 평화. 존중.
그녀는 본다. 미래를. 도착했다. 이곳에. 어지럼증을 느끼며 그녀는 매혹된다. _「시그투나」 중에서
그녀의 기억은 또다시 어떤 순간을 떠올린다. 칠 년 전, 1920년의 가을, 정동의 한 여학교로, 그녀는 순식간에 자신의 기억에 붙들려 돌아간다. 서대문형무소에서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절친한 급우의 어린 시체를 끌어안고서 울부짖던 때로. 급우의 식어버린 몸에, 남루한 옷에, 피로 물든 커다란 수감번호가 뚜렷이 새겨져 있는 참혹한 모습을 눈에 새기며 가슴이 와르르 무너지던 바로 그때로. 감옥에서 풀려나올 동무를 위해 준비했던 어여쁜 머리핀은 그와 함께 땅속에 영영 묻혔다. _「시그투나」 중에서
북토크에서 이야기할 책은 내가 이십 년 전에 쓴 소설로 처음 출간되 었을 때만 해도 거의 팔리지 않았는데, 얼마 전 영화화가 되면서 다시 읽히기 시작했다. R은 그 영화의 제작
자였다. 우연히 들른 카페에서 책을 발견했다며 영화화를 제의해왔다. 안 될 게 뭐람? 그 책은 세상에서 잊힌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나는 반색하며 제안을 받아들였다. _「인도차이나」 중에서
R은 더 이상 말을 잇고 싶지 않다는 듯 건성으로 답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의 그 시큰둥한 표정. 자주 어긋나는 대화. 모든 건 잠이 부족해서라는 익숙한 변명들. 분명 무언가가 기울어지기 시작했다는 찝찝하고 거슬리는 느낌. 걸리적거리는 그 느낌을 더 파고들어 해치우기엔 마주 보게 될 것이 두려웠다. _「인도차이나」 중에서
내내 조용히 운전만 하던 서점 주인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작가님, 작가님은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랑은 좀 다르시네요”라고 약간의 빈정거림이 섞인 어투로 말을 걸어왔다. 나는 그게 또 무슨 뜻이냐고 따져 묻지 않았다. 그 대신 바보처럼 “그런가요” 하고 웃기만 했다. R과 눈이 마주치자 그가 어깨를 으쓱하며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눈을 한 번 굴렸다. _「인도차이나」 중에서
그때 말이야. 우리가 졸업 작품 준비할 때.
정말 그때 얘기할 거니?
응, 필요해. 필요한 것 같아.
그 시절은 나한텐 별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야. 다 지나간 일이잖아. 옛날 일이라고.
하지만 너도 듣고 싶을지 몰라.
그건 네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야.
맞아. 하지만 내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네 문제라고?
네가 상처받은 건 알아. 그런데 그 일로 나도 무척 상처받았어.
어떻게?
너는 잘못을 저질렀지만, 모두의 동정을 받았잖아. 나는 아무도 동정해주지 않았어. 내 상처에 대해서 말이야. 나는 어떤 보호도 받지 못했다고. 완전히 혼자였어.
그 일로 네가 상처받았다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니?
너는 이제 당당하구나. _「조용하고 먼」 중에서
내가 말하는 게 이런 거야. 나는 옳은 일을 하고도 비난받았어.
비난이라. 웃기지 마. 너는 공개 재판이라도 하겠다는 듯이 모두의 앞에서 나를 고발했어. 나는 갈가리 찢겨졌고. 그것으로 부족했다는 거니?
아니야, 충분했어. 너의 굴욕적인 얼굴을 보면서 만족했어.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된 것 같았고.
그런 말 하려고 전화했구나. 아주 마음이 시원하시겠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오해하지 말아줘. 나는 내 아이 얘기를 하고 싶었어.
네 아이?
그래. 내 아이. 내 아이가, 너처럼 굴었어. _「조용하고 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