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책 소개
거대한 외피 속 무른 크림만을 품은 여자가
온통 거칠고 질긴 세상을 견딘 유일한 방법
한국문학의 가장 참신하고 첨예한 작가들의 시선을 담는 〈새소설〉 시리즈가 새롭게 발전한다. 스타일리시하고 감각적인 콘텐츠를 추구하는 ‘뉴-어덜트’를 위한 작품을 엄선해 선보인다. 그 시작을 맡은 우신영의 신작 장편 『죽음과 크림빵』은 지금까지의 〈새소설〉과 다른 차원의 맛을 선사한다. 혼불문학상 수상작 『시티 뷰』로 인간의 욕망과 결핍을 다층적으로 형상화했던 작가는, 『죽음과 크림빵』을 통해 인간의 고독과 체제의 잔혹함을 대학이라는 구조 안에 녹여냈다. 삶의 부조리와 인간 본성의 복잡성을 탐구하는 매혹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소설이다. 쓰디쓴 죽음과 달콤한 크림빵의 부딪힘이 만든, 우신영만이 낼 수 있는 맛의 소설은 그 시작부터 충격적이다.
그저 아름다운 것을 동경한 한 여자의
죽음에 가까운 형상이던 삶에 관하여
[부고] 고산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허자은 교수 본인상
한 대학교에 재직 중인 여교수가 죽었다. 자신의 연구실 화장실에서 변기통에 머리를 박고. 권태로운 지방대에 파장을 일으킨 자극적인 사건에 교수고 학생이고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뭘 얼마나 먹었길래, 괴물처럼 살이 쪄서, 숨쉬기도 힘들었지……. 명복을 앞서는 조롱 섞인 평가는 그녀의 죽음이 삶과 비슷한 모양임을 증명했다.
허자은은 혼자 사는 여자라는 점을 높이 평가받아 교수 면접을 통과했다. 동료 교수들은 허자은의 큰 덩치를 강의 시간 조는 학생들을 깨우는 용도로 활용했다. 허자은은 돼지고기를 못 먹는다는 이유로 동족에 대한 연민이냐는 질문을 받았고, 남자 조교와 성적으로 얽는 농담도 습관적으로 들어야 했다. 학생들은 강단에 선 교수를 비난하고 조롱하기를 넘어 광대 취급하며 유희적 쾌감을 취했다. 열심히 강의하는 것이, 동료를 배려하는 것이, 제자를 존중하는 것이 그 모든 폭력의 당위가 되는 것을 아는 듯 모르는 듯 허자은은 가장 큰 몸집으로 가장 작은 몸짓을 해댔고, 그것은 부동과도 같은 취급을 거뒀다.
씹어 넘기기 힘든 것들로만 가득 찬 곳
오직 보드라운 크림을 탐한 허기진 영혼
허자은의 외로운 삶은 그 유서가 깊다. 떡집을 운영하는 부모 아래서 여자이기에 오빠의 밥을 차렸고, 여자이기에 호기심을 해소하는 놀잇감이 되었고, 여자이기에 살림 밑천 효녀 노릇을 요구받았다. 착한 딸, 착한 동생, 착한 학생, 착한 아이……. 부모가 형제가 학교가 사회가 만든 가늘고 얄팍하지만 날카롭게 조여오는 잣대에 허자은은 기꺼이 맞추고 따르고 응했다.
힘든 부모가 밥 짓지 않도록 팔다 남은 딱딱한 떡을 매일 먹은 작은 소녀. 밤마다 예쁜 여자아이가 되는 꿈을 꾸던 어린 허자은은 그렇게 하루가 다르게 뚱뚱해졌다. 또래보다 빨리 글을 깨치고 공부를 열심히 해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허자은을 바라보는 시선엔 거북함과 우스움이 따라붙었다. 그때 붙은 비열한 그것들은 허자은의 평생을 장식했으니, 허자은도 세상도 참 한결같고 올곧다고 해야 할까.
사람은 본능적으로 갖지 못한 것을 좇는 동물이어서인지 허자은은 늘 아름다움에 현혹됐다. 인형같이 생긴 얼굴, 길게 뻗은 팔다리, 나긋한 목소리만으로도 충분한데―그 어느 것도 허자은은 가진 적이 없는데―그 애는 자기만의 방과 하얀 테이블보와 교양 있는 엄마까지 갖고 있었다. 그 애의 집에서 보고 겪은 여러 ‘처음’ 중 생크림에 찍은 카스텔라는 소녀의 이상이 혀에 닿는 순간을 선물했다. 거칠고 질기고 단단한 것만 씹어온 작은 턱이 처음 맞은, 입에 넣는 순간 으스러져 사라지는 달고 부드럽고 폭신한 그것은 어쩌면 허자은에게 다신 없을 행복의 기갈을 초래하는 불행의 단초였을지도 모른다.
헛것에 길을 들인 나쁜 입맛
견딜 수 없이 잔혹한 폭식 연대기
아름다움을 좇는 삶은 그것에 기꺼이 이용당하는 달콤한 부조리를 가져왔다. 부모가 가져온 떡처럼 주어진 텍스트를 씹어 넘긴 미친 소화력은 허자은이 자발적 시녀가 되는 데 탁월한 도구가 되었다. 예쁜 대학 동기를 위해 자처한 대리 시험, 예쁜 제자를 위해 대신 쓴 대학원 발표문. 그것들이 허자은을 병들게 하다 못해 죽음까지 불러왔다고 한다면 그 탓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 유혹한 것과 유혹당한 것 중 무엇의 죄질이 더 클까.
소화의 총량은 정해져 있는지 텍스트를 과도하게 먹어대기 시작하며 허자은의 섭식에는 문제가 생겼다. 먹고 토하기를 반복, 모든 걸 소화하던 여자는 그 무엇도 소화시키지 못한 채 변기를 붙잡는 일이 잦아졌다. 한 번도 채워지지 않은 마음처럼, 이제는 위장 역시 빈 상태로 내내 허자은을 허기지게 했다.
몸피가 부풀수록 허기진 마음만 커졌던, 검은 재킷 안에 시리고 여린 것들을 감추느라 바빴던, 바로 서 있어도 늘 역류하는 속엣것에 울부짖던 여자는 이제 거꾸로 처박힌 채 모든 부자연스러움을 흘려보내기로 했다. 아무도 이해 못 할 세상 가장 이상한 안락의 형상으로.
‘뉴어덜트 새소설’은
한국문학의 가장 참신하고 첨예한 작가들의
시선을 담는 〈새소설〉 시리즈의 새로운 버전으로,
스타일리시하고 감각적인 작품을 엄선해 선보입니다.
■■■ 지은이
우신영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 대학원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명지대학교와 인천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2024년 장편소설 『시티 뷰』로 혼불문학상을 수상했다.
■■■ 차례
이종수 이야기
– 부고
– 재킷
– 냉장고
– 노트북
– 루즈앤누와르
– 케이크
허자은 이야기
– 떡집
– 구멍
– 공주
– 책
– 손수건
– 요강
정하늬 이야기
– 거미 여인
– 문학의 밤
– 단식 광대
– 개밥
– 뱀의 이빨
– 슈
작가의 말
■■■ 책 속에서
변기에 무른 것들을 쏟고 나면 도넛이 된 것처럼 속이 비었다. 뭐든 밀어 넣지 않곤 잠을 잘 수 없었다. (85~86쪽)
물거품을 핥는다고 갈증이 가시지 않듯 크림을 마셔도 허기는 비키지 않았다. (87쪽)
난 온 힘을 다해 씹어야 하는 음식을 먹어왔어. 뻣뻣해진 가래떡, 쉬기 직전의 곤드레밥, 딱딱해진 콩자반, 고추장에 박힌 대멸치, 군내 나는 김장 김치. (101쪽)
나도 그 손길을 받아보고 싶었어. 그 아이의 행동을 복사하듯 따라 했지. 똑같은 몸짓으로 종이를 떼고, 똑같은 속도로 카스텔라를 베어 먹고, 똑같은 강도로 크림을 찍었어. 보드라운 빵의 속살과 더 보드라운 크림이 뭉개지며 뒤엉키던 오묘한 느낌. 축축하고 뭉클한 것이 목구멍을 타고 내 안으로 미끄러져갈 때의 감각. 물론 여자는 내 입을 닦아주지 않았어. (101~102쪽)
계속 내 구멍과 허기에 대해 연구했지. 일종의 헝거 아티스트랄까. 처음엔 바깥의 음식으로 내 허기를 채워보려 했어. 아무리 넣어봐도 꽉 차진 않더라. 그런데도 몸은 부풀어만 갔어. 억울했지. (108쪽)
내가 계산하지 못한 게 있었어. 구멍을 비우고 나면 더 맹렬한 허기가 찾아온다는 거, 구멍 자체가 허기를 학습한다는 거, 더 압도적인 허기만이 나를 지배하게 한다는 거. (109쪽)
난 더 이상 떡은 먹지 않아, 특히 가래떡은. 토할 때 잘 나오지가 않거든. 저 바닥까지 가라앉아서 올라오질 않아. 크림빵은 반대지. 허리만 살짝 틀어도 쏟아져 나와. 심지어 토할 때도 달콤하지. 제니의 집에서 난생처음 먹었던 그 생크림처럼. 혀를 마비시킬 듯이 달고 가벼운 크림이 좋아. 들러붙지 않고 녹는 부피 없는 빵피도. 나도 그렇게 사라지고 싶어. 녹아버리고 싶어. 물거품이 되어서 변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싶어. (110쪽)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닮아 있었어. 비썩 마른 손으로 타인의 구멍에 손가락만 넣어보는 이들, 창문 앞에서 세상의 허무를 구경만 하는 이들, 몸으로 살지 않고 상상으로 사는 이들. (143~144쪽)
긴 여정이었어. 변기통 위에서 울부짖던 떡집 여자의 구멍에서 태어나 그 위에서 처음으로 다리를 벌리고 소화할 수 없는 것들을 구멍 속에 흘려보내다 마침내 세상에서 소화되지 못한 내 몸으로 구멍을 메우기까지. (151쪽)
이제 난 내게 맞는 집, 요강이 있는 골방, 뿌리를 거꾸로 박을 자리를 찾은 거야. 좁지만 아늑하고 차갑지만 달콤할 거야. 거기로 들어가 문을 잠그고 쉬고 싶어졌어. (151쪽)
내 구멍을 채워줬던 그 모든 것을 게워내며 나는 이만 사라져. 그럼 이제 안녕. (151쪽)
문학하는 거지였다. 헛것에 길을 들인 나쁜 입맛의 거지. 그래서 자꾸 헛것만 폭식하는 거지. 아무리 적막의 아가리에 텍스트를 처넣어도 허기를 면하지 못하는 거지. (159~160쪽)
살이 쪄서 숨쉬기도 힘들어하는 사람한테 쿠키를 주는 건 너무 달콤한 살인미수 아닐까. (190쪽)
이 망할 껍데기와 화해하는 법을 모르겠어서 가끔 저렇게 제 속을 까뒤집고 싶을 때가 있었다. 주머니를 아무리 훑어도 찾아지지 않는 무언가 때문에 안감을 통째로 뒤집어보는 마음. 피어싱이 그래서 좋았다. 껍질에서 알맹이까지 더듬어 가지 않고, 안과 밖을 뒤집지 않고도 단번에 전체를 관통해버릴 수 있으니까. 천공 행위만이 줄 수 있는 격렬한 통쾌함. (197쪽)
짙고 끈적한 무정형의 덩어리. 그것은 마치 모든 존재가 태어나기 이전의 상태, 혹은 죽어버린 이후의 상태처럼 보였다. (……) 묵직한 상태로 멈춰 버티던 그것은 결국 물살에 패이며 한바탕 으깨지더니 빙글빙글 회전하며 구멍 속으로 사라졌다. (237~238쪽)
내 죽음의 한 연구. (……) 이것이 소설인지, 아니면 그의 일기나 자서전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한 사실이 있었다. 허자은에겐 발화하고 싶은 고통이 있었다는 것. 메우고 싶은 구멍이 있었다는 것. 맛보고 싶은 달콤함이 있었다는 것. (23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