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우리는 반드시 만나야 했던 존재들처럼 눈을 맞췄다.”
육지와 심해, 인간과 미지의 생명체
결코 닿을 수 없는 두 점을 잇다
네오픽션 ON시리즈 31권으로 강민영 작가의 판타지 소설 『작별의 현』이 출간되었다. 『작별의 현』은 심해 속 미지의 생물과 육지의 인간이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그동안 여성의 연대와 자립을 주로 다루던 강민영 작가는 이번에도 전혀 다른 두 인물이 겹치는 지점을 예리하게 포착해낸다. 인물들 사이의 미묘한 감정선과 서사적 긴장감을 놓치지 않으면서, 심해라는 신비로운 배경을 토대로 인물과 세계관에 독자를 한껏 몰입시킨다.
누구보다 바다와 해양생물의 보존을 바라는 해양 과학자 ‘유진’과 깊은 바닷속에 서식하는 발라비 종족 ‘네하’. 원을 그리듯 영영 닿을 수 없을 것만 같던 두 존재가 우연히 하나의 선으로 이어지는 순간, 지독히 깊은 수심도 더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언어도 환경도 다른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더 오래 눈을 맞추고 머지않아 닥쳐올 위험으로부터 상대방을 지키기 위해 모든 걸 내던질 뿐이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컴컴한 바다에서 서로를 알아본 두 존재의 눈부신 만남을 보고 나면, 누구라도 한 번쯤 오래도록 기억될 소중한 존재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 지은이
강민영
2020년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부디, 얼지 않게끔』 『전력 질주』 『식물, 상점』 『작별의 현』, 산문집 『자전거를 타면 앞으로 간다』를 썼다. 영화 매거진 『CAST』의 편집장을 맡고 있다.
■■■ 차례
빛나는 조각
신호
접촉
탐사
첫 번째 만남
해무
기록
두 번째 만남
경고
수면 위로
작가의 말
■■■ 책 속에서
책 속으로
저런 걸 본 적이 있던가. 네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저 알 수 없는 물체가 이 세계에 속한 게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러자 계속해서 파들거리던 등의 지느러미들도 일순 활동을 멈췄다. 가까이 다가가봐도 좋을까. 뭔가 위험한 생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전에 네하의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잡아야 해. 저걸 잡아서 확인해야 해. 그런 생각이 온통 머릿속을 잠식했다. (25쪽)
“사, 사람인가?”
유진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리다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아니, 그럴 리는 당연히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서유진. 유진은 뺨을 가볍게 툭툭 치고 눈을 여러 번 비비고 난 후 다시 모니터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건 꿈이 아니었다. 사진 속에는 인간의 형상이 분명 보였다. 그것도 아주 길쭉하게 인간의 모습을 부분적으로 늘어놓은 듯한, 그러니까 마치 이건…….
‘인어?’ (48쪽)
길쭉하고 가느다란 머리털, 사방으로 뻗은 팔과 다리 그리고 가장 위에 달린 얼굴까지 전부 발라비와 같았다. 네하는 미친 듯이 뛰는 가슴을 겨우 진정하고, 인간을 묘사한 그림 바로 옆에 붙은 설명을 또박또박 읽었다.
“육지 종족, 발라비의 천적 중 하나, 해양생태계를 비롯해 가장 위험한 종족 중 하나, 연구 자료 부족…….”
인간 챕터는 다른 생물들처럼 설명이나 묘사가 풍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얼마 안 되는 설명이 전부 발라비들의 금지구역이 설정된 이유가 인간 때문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있었다. (81쪽)
유진이 좋아하는 바다의 고요가 사방에 깔려 있었다. 쓰레기로 뒤덮인 바다의 표면은 검고 잿빛의 혼탁수로 가득하지만, 그 아래는 유진이 평생을 사랑해온 바다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풍경임에도 유진은 늘 이 온전함에 감사했다. 바다의 생태는 엉망이 된 지 오래일지언정 그 아래서 부단히 노력하는 생물들이 분명히 있다. 그들 덕분에 바다가 가진 고유의 색이 아직까지는 아슬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93~94쪽)
유진과 네하의 눈이 동시에 마주쳤다. 네하는 ‘인간’이라는 단어밖에 떠올릴 수 없었다. 잠수정 유리 너머로 보이는 놀란 표정의 생물은 책에서 본 그림의 묘사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아니, 저걸 단순히 ‘닮았다’고만 말할 수 없었다. 인간. 저것이 인간이구나. 정말로 발라비와 같은 모습으로 생긴 저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존재구나. (111~112쪽)
인간을 등지고 마을로 내려올 때만 해도 바로 키라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고하고 싶었다. 그래야 이 두근거리는 마음, 일생일대의 경험을 했다는 사실로 펄떡거리는 마음이 진정될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을 구역에 진입한 후 생각이 바뀌었다. 당분간은 키라에게 알리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32쪽)
네레이드는 절대 인간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존재이며 함부로 건드려서도 안 되는 존재였다.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질지 예측할 수 없고 네레이드를 다시 만나지 못할 가능성도 높지만, 이 사실만은 너무나 명백했다. 지금까지 그 어떤 생물도 허투루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이번만은 여느 때보다 더 자명했다.
최대한 이 존재를 숨기며 보호해야 한다. 그게 새롭게 떠오른 유진의 사명이었다. (146쪽)
잠수정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네하와 유진은 조금 더 가깝게 붙어 서로를 응시했다. 이 순간이 다시 찾아오기를 얼마나 고대했던가. 해류를 읽고 바다를 바라보며 아주 작은 흐름, 아주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둘은 그 자잘한 기회와 또 한 번 반복된 우연의 일치가 만들어낸 지금을 놀랍도록 담담히 받아들였다. 네하와 유진은 반드시 만나야 했던 처연한 이야기 속 존재처럼 눈을 맞췄다. (160쪽)
“인간과 닮은 생명체라고요? 왜 진작 보고하지 않았나요?”
몇 주 만에 중앙 기지에 얼굴을 내비친 국장의 낮은 목소리가 네레이드의 그림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유진의 귓가에 들려왔다. 유진은 고개를 들어 국장의 표정을 확인했다. 국장의 등 뒤에 빼꼼히 고개를 내밀고 있는 석주가 유진의 시야에 들어왔다.
석주는 웃고 있었다. 마치 이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표정으로. 그 어느 때보다 더 비열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173~174쪽)
“안 돼!”
유진이 크게 소리 질렀다. 그 소리를 네하도 듣긴 했으나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네하는 유진의 표정 변화를 주의 깊게 바라봤고, 이게 어떤 상황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유진이 내지르는 비명이 경고의 메시지라는 것만은 직감할 수 있었다. (195~19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