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그 아이를 죽이고자 하는 열의가
나를 살게 하는 모든 것이었다
#사랑 #우정 #연대 #집단 #소외 #강박 #공포 #저주 #살의 #살인
아포칼립스 장르소설들로 이 시대의 여러 상실을 메꿔온 배예람 작가의 첫 장편소설 『살인을 시작하겠습니다』가 〈YA!〉 시리즈 스물여섯 번째 책으로 출간되었다. 배예람 작가는 ‘학교’라는 공간적 배경과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학교 ‘생활’에 주목하여, 청소년기 때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사회적 문제들을 시사한다. 누군가는 학교라는 집단에서 찬란한 학창 시절을 보냈을 수도 있지만, 반대로 누군가는 많은 폭력에 노출되어 끔찍한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다. 그 시절을 직접 지나고 있거나, 이미 지나온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면서도 치유하는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이 소설은 어느 날 학교에서 눈을 뜬 ‘나희’와 ‘이경’이 ‘제0교시 살의 영역’ 시험에 응시하게 됨으로써 맞닥뜨리는 시련을 게임 형식으로 박진감 넘치게 이끌어감과 동시에, 두 인물의 시점을 교차하며 마음속 염증을 건드린다. 한때 누구보다 절친한 사이였던 ‘나희’와 ‘이경’이 서로를 죽여야만 끝나는 ‘제0교시 살의 영역’은 과연 어떤 결말을 불러올까? 그리고 그들은 어째서 서로를 죽이고 싶은 ‘살의’를 품게 된 것일까?
■■■ 지은이
배예람
앤솔러지 『대스타』에 「스타 이즈 본」을 수록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좀비즈 어웨이』를 펴냈다. 느슨하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이야기를 쓰는 삶을 목표로 한다.
■■■ 차례
1층 목이 긴 여자
5층 거미를 닮은 남자
2층 움직이는 인체모형
4층 노래하는 음악 선생님
3층 그리고……
에필로그
작가의 말
■■■ 책 속에서
2024년도 6월 고2 전국연합학력평가 표지, 그 아래 쓰인 의미를 알 수 없는 글자가 또다시 뇌리에 박혔다. 제0교시 살의 영역. 그리고 필적확인란에 적어야 할 문구도 보였다. ‘죽이고자 하는 열의가 나를 움직이는 모든 것이었고.’ (15쪽)
학교라는 것은 결국 수많은 무리로 이루어진 집합체다. 무리에서 배제된 아이들은 커다란 덩어리 사이사이에 낀 작은 알갱이다. 매번 밀려나는 알갱이들에게 제자리 같은 건 없다. 그렇게 혼자인 게 당연해져버린다. 한번 당연해진 알갱이는 영원히 알갱이로 머무를 수밖에 없다. 그게 학교의 섭리고 규칙이므로. (29쪽)
무리로 똘똘 뭉친 아이들은 덜 자란 몸과 덜 자란 마음으로도 필사적인 아이를 충분히 눈치챈다. 그들은 필사적인 아이를 좋아하지 않는다. 필사적인 아이는 비참해 보이기 때문이다. (29쪽)
이경은 나희가 자신을 위로해주길 기대했다. 그러면 나희에게 순수하게 분노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다못해 멍청하게 혹시 아까 뭐 하던 거야? 하고 물어도 좋았다. 깔깔대며 나희의 멍청함을 비웃고, 네 목구멍에 손가락을 쑤셔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해보라는 악담을 쏟아낼 수 있을지도 몰랐다. (68쪽)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이경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모습을, 여덟 개의 눈알이 비웃듯 바라보고 있었다. 이경은 손을 뻗어 그 까맣고 반들반들한 눈알 위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길게 자란 손톱으로 까만 유리알을 꾹 눌렀다. 젤리처럼 말캉한 무언가가 이경의 손바닥 밑에서 뭉개졌다. (72쪽)
어떤 사람이 너무 중요해지면, 세상에 그 사람과 나 단둘만 남아도 괜찮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는 법이지, (113쪽)
참고 참았던 지독한 말들이 나희의 위장 속에서 목구멍을 타고 올라왔다. 제발 내 말 좀 들어. 토하지 마.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을 거야. 네가 혼자가 되었으면 좋겠어. 아무도 네 곁에 남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아니면 널 견딜 사람이 있기나 할까? (114쪽)
너는 내가 죽기 직전까지 말라야 그제야 좀 사람처럼 보인다고 칭찬하는 엄마를 가진 것을 죽어도 이해하지 못했지. 이해한다는 표정을 했지만 끝내 고개를 갸웃거렸지. (132쪽)
나희는 만년필을 집어 들어 이경의 허벅지를 찔렀다. 저 마른 팔다리에서 어떻게 조금 전과 같은 힘이 솟아올랐는지 좀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경의 체육복 바지가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경은 덤벼들고, 나희는 피하고. 혹은 나희가 덤벼들고 이경이 피하고. 둘은 점액 위를 계속해서 뒹굴었고 만년필로 상대의 팔과 다리를 찍었으며 목을 조르거나 밀치기도 했다. 사람을 죽여본 적 없는 두 고등학생의 살의는 우스울 정도로 비참하고 필사적이었다. (166쪽)
여자의 커터 칼이 다시 한번 나희의 복부를 꿰뚫으려는 순간, 이경이 여자에게 달려들어 목을 물어뜯었다. 여자의 살점에 악취가 고여 있을 게 분명한데도 이경은 멈추지 않았다. 여자가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는 동안 이경은 여자에게 매달려 여자의 목을 잘근잘근 씹었다. 퉤, 검은 살점을 뱉는 이경의 입술과 이가 검붉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173쪽)
큼, 큼! 주목, 주목! 0교시 살의 영역 합격자가 탄생했습니다! 0교시 살의 영역 합격자가, 탄생했습니다……. (18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