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잔잔한 장르문학판에 먼지바람을 일으킬 귀여운 것들이 찾아왔다! “우화와 괴담을 한 접시에 플레이팅한 어른을 위한 야식”(강지영 소설가) 같은 소설, “기예르모 델 토로의 영화 속을 거니는 듯한 환상적인 느낌”(김희선 소설가)을 가진 작품이란 찬사를 받으며 야심 차게 등장한 ‘제11회 네오픽션상 우수상 수상작’ 『귀여운 것들』이다. 우리의 주변에, 사회의 작은 틈에 어쩌면 영사 중일지도 모를 작고 귀여운 것들의 치열한 생존 투쟁을 다룬 이 소설은 판타지와 호러를 잘 차려입은 ‘지금 현실’의 이야기다. 하찮고 우스운 사건들을 거닐며 순간순간 번뜩이는 쓰고 아릿한 기억들이, 읽는 내내 이 소설 심장부에 각인된 메시지를 선명히 드러낼 것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맹렬하게 뽀짝대는 이 세상 모든 귀여운 것들에 바치는 잔혹한 헌사 속으로 들어가보자.
■■■ 출판사 리뷰
인형이 인형답지 않아진 순간,
인형은 생명력을 잃는다는 진실
여기 교복 입은 한 소녀가 있다. 이름은 이희지. 그녀에겐 어릴 때부터 손에 쥐고 놓지 않던 애착 인형이 있었으니, 보드라운 파란 양털과 분홍빛의 동그란 코를 가진 맑은 눈의 토끼 인형, 이름하여 ‘깔랑’. 이희지는 어린 시절 깔랑을 제 신체의 일부처럼 여기며 물고 빨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깔랑은 그녀에게 그저 수많은 인형 중 하나가 되었다.
‘나를 잊었어? 내가 보이지 않아?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우리는 정말 좋은 친구였잖아. 나밖에 없다고 그랬잖아! (21쪽)
깔랑은 속으로 외쳤지만 이희지에게는 닿을 수 없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인형을 돕는다고 했던가. 어느 늦은 밤, 깔랑의 다리에 힘이 생겼다. 제 의지로 번쩍 일어설 줄 알게 되었고, 도도도 걸을 수도 있어졌다. 깔랑이 그 즉시 한 일은 다름 아닌 희지에게 손 내밀기. 자기 세상의 전부인 그녀를 만지고 싶었기에. 하지만 희지는 깔랑의 손이 제 얼굴에 얹어진 바로 그 밤, 깔랑의 귀를 아무렇게나 그러쥐고 밖으로 나가 쓰레기처럼 버려버렸다. 작은 토끼 인형의 절규에도 희지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고, 깔랑은 혼자가 되었다……고 하기엔 너무나 곧바로 두 번째 주인이 생겼다. 그러나 깔랑은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알아차렸다. 어쩌면 차라리 혼자인 게 나을 수 있었음을.
금기, 어쩌면 인간적 이기의 다른 이름
새카만 코트, 새카만 옷과 구두, 새카만 머리칼. 검은 여자의 집에는 온갖 인형이 가득했다. 조금 특이한 점이라면 그것들은 어딘가 찢겼거나 뚫렸거나 떼어진, 온전하지 않은 조각 인형이라는 것, 그중 지점토로 만들어진 웬 덩어리가 검은 여자를 향해 엄마라고 외쳐대는 것, 그 소리에 발작하듯 검은 여자가 돌망치로 수분기 하나 없는 회색 몸뚱이를 으깨버린 것 정도랄까. 가까스로 다시 뭉쳐진 지점토 인형은 이전보다 훨씬 괴상한 모습이었고, 검은 여자가 자리를 비우자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이렇게 이름할 수 있었다. 인형 고문관. 이 집에 온전한 인형이 없는 이유이자 새로 입성한 깔랑이 위험한 이유였다. 검은 여자가 자기에게 가한 폭력처럼 지점토 인형 역시 다른 인형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대물림하듯, 배운 건 그것뿐이라는 듯, 마치 폭력이 사랑의 다른 이름이라도 되는 듯.
손발이 묶여 아홉 번째 시침핀이 깔랑의 배에 꽂히려던 순간이었다. 검은 여자는 또다시 나타나 지점토 인형을 괴롭혔다. 자신을 고문하던 그를 도울 마음은 1도 없었지만, 그의 빌어먹을 텅 빈 눈빛, 제대로 사랑받아본 적 없는 서글픔 담긴 표정이 깔랑으로 하여금 불쑥 이희지를 연상케 했다. 자신을 버린 주인이지만 그녀를 생각하며 깔랑은 몸을 날려 검은 여자의 눈동자에 시침핀을 박아 넣었다. 그렇다, 자신의 배에 꽂혀 있던 그것이었다.
깔랑은 금기를 깼다. 인간을 다치게 했기에 더 이상 누군가의 인형으로 살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슬프고 후회되는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오히려 자유롭고 당당한 얼굴이었다.
“주인 따위 필요 없어.” (64쪽)
더는 부드러울 필요도, 귀여울 필요도 없어진 깔랑은 드디어 기회가 주어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스스로 생각할 기회가.
당신이 아는 그로테스크와
그로테스크라 일컫는 것들의 간극
내 이름은 그로테. 그로테스크라는 영어 단어에서 가져왔어요.
‘괴기스럽고 끔찍하다’는 뜻이랍니다.
이름이라는 건 꽤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어떤 것의 정체성은 이름에서 나타나니까요. 아, 징그럽고 괴기스러운 성질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사실이 억울하지 않느냐고요? 전혀요. 속
상하다고 느껴본 적도 없는걸요. 사실, 이 이름은 내가 지었거든요. (67쪽)
그로테는 팔이 네 개나 달린 불량품 인형이다. 폐기될 위험에 처한 그를 공장에서 구해준 주인은 그로테에게 있어 봄날의 햇살이었다. 이 집에도 이상한 인형들이 가득했는데, 멀쩡한 인형을 해치는 검은 여자의 집과는 경우가 달랐다. 일종의 장애가 있는 인형을 골라 모아 안전하게 지켜주는 안식처였다. 그런 따스한 주인의 곁에서 그로테는 주체적이고 용감한 인형으로 지냈다. 그래서 주인의 죽음은 그로테에게 엄청난 충격일 수밖에 없었다.
주인은 외로운 인간이었다. 비정상적인 인형들과 실험용(으로 쓰이고 버려지기 직전 주인이 주워 온) 쥐들만이 곁에 있었다. 생전 천사 같던 인간이 돌연 좀비가 되어 기행을 저지르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죽은 주인의 명예를 지키는 일은, 그간 사랑받아온 그들의 몫이었다.
혹 난 쥐도 그중 하나였다. 고름이 가득한 혹을 턱에 매달고 다니면서도 주인을 위해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그는 타의 모범이 되는 쥐였다. 그로테가 비겁한 스스로를 내던지고 용기내 끝내 주인을 지키게 한 역군이었다. 그러다가 털이 다 빠져도, 뼈만 남아도 괜찮았다. 그럼 그냥 뼈다귀로 살면 되는 거니까.
죄 없는 동물을 유기하는 인간
작디작은 몸으로 친구를 지키는 동물
쥐가, 그것도 뼈밖에 남지 않은 치면 부러질까 불면 날아갈까 걱정되는 그것이 고양이를 지킨다면 어떻겠는가. 여기 고도3동 놀이터에서 실제 일어난 일이다.
뼈다귀가 건어물 말리듯 햇살 아래 몸을 늘여놓은 어느 오전, 한 수상한 인간이 놀이터에 들어오더니 벤치 아래 깊숙이 가방 하나를 밀어 넣고 사라졌다. 참, 이런 말을 남겼다.
“로얄, 여기에서 기다려.” (108쪽)
가방에 담긴 것은 풍성한 흰 털과 겁먹은 까만 동공을 지닌, 곱게 자란 것이 분명한 고양이였다. 버려졌지만 그것을 인정하기엔 고양이의 몸엔 아직 고고함이 가득 배어 있었다. 매끄러운 마루나 보드라운 양탄자가 아니면 밟지도 않겠다는 듯 가방 속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인간의 거짓을 믿고 싶어하는 고양이와 그런 고양이를 지켜주고 싶은 뼈다귀는 수없이 투닥대며 대립하지만, 매서운 현실 앞에 동맹을 맺고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간다. 그러던 중 뼈다귀의 일방적인 보호 아래 있던 고양이가 각성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뼈다귀가 그랬던 것처럼 고양이는 뼈다귀를 구하기 위해 제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용기를 발휘한다. 인간의 손길만 타던 곱게 자란 고양이가 온 털에 피를 묻히고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수치와 고통을 이겨내다니. 유기된 로얄에서 벗어나 진정한 ‘흰털’이 되는 순간이었다. 엉망이 된 몸으로 어쩌면 더 건강하게 살게 된 순간의 시작이었다.
가장 낮고 작고 여린 시선으로 보내는
가장 높고 크고 단단한 외침들
이렇듯 귀엽고 안타깝고 용감한 비인간들로 가득한 이 소설 속에는 인형이나 동물을 손쉽게 버리는 인간의 매정함은 물론, 아동학대와 납치, 감금, 착취, 외모 지상주의 등등 이 시대의 사회적 문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특히 작고 여리고 인간의 손이 필요한 개체의 시각에서 사건이 진행되는 만큼, 읽는 이로 하여금 낮은 시선의 입장을 생각하게 한다. 늘 위에서 내려다보는, 마음대로 주물거리는 입장이던 우리가 작고 여린 존재가 되어보는 것이다. 이 『귀여운 것들』과 만난 이후 작은 골목 끄트머리에 덩그러니 놓인 인형이, 집 근처를 어슬렁거리는 고양이가, 하수구 근처에 쌓인 낙엽이 예전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작고 말 없는 것들의 안위가 신경쓰일 것이다. 마음의 날 선 부위가 조금은 뭉툭해질 것이다.
■■■ 지은이
기에천
인간 이외의 것만 사랑하는 지독한 비인간주의자. 그래서인지 다시 태어난다면 꼭 용이 되고 싶다. 실험 대상으로 쓰이지 않기 위해 사람들을 잘 피해 다니겠다는 허무맹랑한 다짐을 자주 하는 편이다. 순수하게 재밌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운 좋게도 그런 즐거움은 현재진행형이다.
■■■ 차례
도살자 깔랑
그로테 grote
어디든 뼈다귀
대단해, 곰 사건!
이희지, 그리고……
작가의 말
■■■ 책 속에서
인형이라는 건 말이야, 제 생각과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순간부터 쓸모가 없어지는 거더라고. 누가 당기면 당겨지고 밀면 밀쳐져야 하는 게 인형의 존재 이유라는 걸 미처 몰랐지 뭐야. (도살자 깔랑, 18쪽)
버림받은 인형. 그만큼 비참한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할 리 없었다. 평생을 이희지만 바라보며 버텨왔던 깔랑에게 주인 없는 삶이란 용이나 유니콘과 같은 것들이었다. 이름은 있으나 그 누구에게도 발견되지 않은 존재들. (도살자 깔랑, 26쪽)
이희지는 바깥세상을 아는 인간이었다. 사람과 사랑에 눈이 먼 인형에게 이 세상이 어떤 벌을 내리는지, 깔랑의 주인이 모를 리 없었다. (도살자 깔랑, 38쪽)
네가 조심해야 할 건 저것들이야. 힐끔거리는 걸 봐. 지금 너를 노리고 있어. 폭신하고 따듯한 네 배에 알을 낳고 싶은 거야. (도살자 깔랑, 43쪽)
인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인간이 정해준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다가오는 인간의 어떤 손길도 거부하지 않는다. 그래야 하는 게 인형이다. (도살자 깔랑, 59쪽)
인형은 예쁘고 귀여워야 합니다. 그래서 나처럼 실수로 팔이 두 개나 더 달려버린 불량품은 폐기되어버리죠. 하지만 나는 네 개나 되는 팔을 부끄러워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꽤나 장점이 많단 말이죠. 남들이 나를 보고 비정상이니 쓸모가 없다느니 지칭하는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타인이 만들어놓은 틀에 나를 꼭 맞출 필요는 없잖아요. (그로테, 68쪽)
“주인은 다른 인간들과는 달라. 특별하다고. 하찮은 인간들의 방식은 이제 버려야 해. 우리 식대로 장례를 치르자고.” (그로테, 77쪽)
인간들의 말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어떤 때는 오물이 둥둥 떠 있는 썩은 물보다도 더러웠다. (그로테, 85쪽)
기형으로 탄생한 실험용 쥐들이 실험실에서 탈출했던 순간, 그들은 더 이상 버려져야 할 것들이 아닌 주인의 소중한 쥐가 되었다. (그로테, 95쪽)
동물들의 감각은 때로 너무 쓸데없이 뛰어나다. 너무나 뛰어나서 어떨 때는 서러울 정도였다. (어디든 뼈다귀, 117쪽)
버려진 고양이들에게 펼쳐지는 미래는 하나같이 비슷했다. 죽는 것. 굶어 죽거나 맞아 죽거나. 과정이 어찌 되었든 상관없이 결과는 모두 죽음이었다. 인간들은 이토록 무능력한 맹수들이 제 먹이 하나 찾을 수 있을 거라 착각했을까? 어찌 되었건 살아가기 위해 억척스럽게, 대단한 모험을 견뎌나갈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니, 그건 동물을 쉽게 유기한 인간 자신을 위한 거짓일 뿐이었다.. (어디든 뼈다귀, 118쪽)
“그건 널 버린 인간이 지어준 이름이잖아. 다른 이름이 필요할 것 같은데?” (어디든 뼈다귀, 124쪽)
“너는 버려진 게 아니야. 아주 잠시 새로운 모험을 할 기회를 얻은 것뿐이야.” (어디든 뼈다귀, 125쪽)
이 꼴을 하고도 뼈다귀의 삶과 죽음에 대해 가장 먼저 묻는, 세상에서 제일 순진하고 순수한 짐승 때문에 뼈다귀의 억장이 무너질 뻔했다. (어디든 뼈다귀, 141쪽)
곰을 곰으로 살게 해주는 것. 그건 단 한 방울의 꿀이었다. 하지만 숨 가쁘게 달리다 보니 곰은 너무나도 익숙해 진절머리 나는 공간에서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대단해, 곰 사건!, 164쪽)
그로테는 튜브를 목에 낀 듯, 목걸이를 한 듯 꿰고 온 호떡을 곰에게 건넸다. 덕분에 그로테의 얼굴과 머리가 온통 꿀 범벅이었다. 그의 대단한 도덕 관념 때문에 호떡 한 봉지를 전부 훔칠 수는 없었는지, 아주 작디작은 호떡 하나뿐이었다. (대단해, 곰 사건!, 183쪽)
검은 여자는 어떻게 해서든 지점토 인형을 되찾아 다시 반죽해야 했다. 그래야 원래 제 것이던 완벽한 아름다움을 되찾을 수 있을 테니. (그리고 이희지……, 190쪽)
“도대체 누가 이런 짓을 하는 거야? 사람들은 참 이상해. 역시 인형이 더 낫다니까.” (그리고 이희지……, 212쪽)
지점토 인형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다. 불러줄 사람도 없는 이름을 계속해서 간직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이희지……, 22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