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영어를 배우러 한국의 영어마을로
유학을 떠난 ‘놈’들의 사무친 광기가 폭발했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글’을 배우는 동시에 ‘영어’도 능통해야만 하는 현실이다. 어렸을 때부터 영어유치원과 영어학원을 다니는 것도 모자라 청소년이 되어서는 주요 교과목인 영어 점수를 높이려 고군분투한다. 이 악착같은 경쟁의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에서 살아남으려면 타국의 모국어를 자국의 것처럼 말하고 들을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의무교육이 끝나고 사회에 나가도 영어 점수와 등급이 ‘나’의 가치를 판단하고 가능성을 결정한다.
때로 불편한 진실은 그 모습 그대로 마주하기보다 우회적으로 포착할 때 더 효과적이다. 김준녕 작가는 한국의 영어 우월주의를 적나라하고 가감 없이 보여줌으로써 이 사회의 현주소를 형상화한다. 만국 공통어인 ‘영어’의 중요성을 괄시하는 바는 아니나, 한국인이라면 분명히 직시하고 되돌아봐야 할 문제임은 분명하다. 통쾌하고 신랄한 이야기만을 기대했다면 오산이다. 그 이상의 통쾌하고 발랄한 서사 구성과 캐릭터를 통해 ‘영어가 필요한 이유’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을 넘어 ‘우리 삶을 이끄는 가치’를 고민하게 할 소설이다.
Boom bap ♪♪
영어 천재를 노리는 한국인들의 리드미컬한 모험
22년째 영어 공부에 매진했으나 제자리걸음인 ‘라이언’에게 팸플릿 하나가 던져졌다. “P시 영어마을 성인반 모집”이라 적힌 팸플릿을 보자마자 그에게 돌아온 대답은 권유가 아닌 엄마의 협박, “Lion, Please”뿐이다. 일사천리로 짐을 싼 그의 앞에 승합차 한 대가 정차하더니 하이틴 영화에서나 볼 법한 외국인 ‘릴리’가 내려 걸어왔다. 부모님의 눈물을 머금은 얼굴과 울음을 삼키는 목소리도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라이언’을 보냈고, 결국 그는 승합차에 탑승한다. 그런데 승합차에 타 있는 구성원들이 어딘가 심상치 않다. 일본 애니메이션을 좋아할 듯한 백인 남자와 온몸에 문신이 그려진 남자, 잔뜩 울상을 짓고 창밖을 내다보는 어린아이였다.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직감한 ‘라이언’이 곧장 차에서 내리려는 순간, 싸늘한 표정의 ‘릴리’가 차갑게 식은 목소리로 말했다. “뭘 봐? 가서 앉아.”
두 얼굴의 ‘릴리’는 서로 자기소개를 하라 시키며 “Only English!(오직 영어로)” “Full sentence(완벽한 문장)”을 조건으로 건다. 별수 없이 좌우를 살핀 ‘라이언’은 백인 남자를 바라봤다. 그러나 이게 무슨 일인가! 벽안에 금발인 ‘보타’의 입에서 튀어나온 건 한의 정서가 가득 담긴, 구수한 한국말이었다. 이어서 문신이 몸을 뒤덮은 ‘준’의 별명을 들은 ‘라이언’은 충격에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일명 ‘LA 예절 주입기’, LA 출신 갱스터이나 영어는 결코 쓰지 않는다 것이다. 게다가 영어마을에 도착하자마자 눈에 띈 외국인 두 명에 또다시 시선을 빼앗긴 ‘라이언’은 K-POP을 좋아해 한국어와 영어를 동시에 배우러 왔다는 중국인 ‘샤오’, 일본인 ‘시게루’와 한 팀이 되고 망연자실한다. 영어를 배우러 한국의 영어마을로 유학까지 왔는데, 도대체 이게 무슨 조합이란 말인가!
Englishメ
오싹하고 기괴한 히피해피hippiehappy 영어마을
영어마을에 도착한 성인들 앞에 나타난 사람은 외국인도, 원어민 교사도, 가이드도 아니었다. 정년퇴직을 앞둔 국사 선생님 같은 중년 남성이었다. 자신을 ‘선생’이라 소개한 그는 학생들에게 계약서를 건넸다. 한마디로 이곳에 들어올 땐 쉬었으나 나갈 땐 그럴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그때 선생에게 반발하던 ‘샤오’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바닥에 쓰러진다. 이어서 빛보다 빠르게 허공을 가른 선생의 단소를 보고 그 자리는 아비규환이 된다. 더 할 말이 있으면 해보라는 선생에게 ‘라이언’은 용기를 내 손을 든다. 그리고 말하길, “We have the right to leave here(우리에겐 여길 떠날 권리가 있어요).” ‘샤오’처럼 단소에 두들겨 맞을 각오를 했던 ‘라이언’에게 선생은 뜻밖에도 다정한 미소를 짓는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 “Nope(안 돼).” ‘라이언’은 잔뜩 겁에 질린 학생들과 의기양양한 선생을 죽 둘러보고서 나지막이 읊조렸다. “Fuck you(엿 먹어).”
영어 실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켜준다는 영어마을의 커리큘럼은 이러했다. ‘Pop songs과 Dancing으로 귀 뚫기’ ‘보상과 함께 암기 쏙쏙 영단어 Quiz’ ‘외국인 선생과 함께하는 Role play’. 대충 들어도 과연 성인을 위한 수업이 맞는지 의심될 이 수업들은 알면 알수록 기이하다. 우드스톡 페스티벌을 연상케 하는 팝송의 향연 속에서 피어오른 의문이 연기에 취하는가 하면, 과제를 해내려 피자를 사 먹었다가 경찰에 체포되었을 뿐아니라 어린이반과의 퀴즈 대결에서 연이은 패배로 현실의 쓴맛을 겪는다. 영어를, 그것도 완벽한 문장을 말하지 못하면 밥조차 먹을 수 없는 이곳에서, ‘라이언’ 일행은 자유를 억압하는 선생과 원어민 교사들에 맞선 대격돌을 신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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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마을의 히든 미션, 스파이
이쯤에서 우리는 ‘라이언’ 일행이 왜 영어마을에 왔는지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라이언’의 가족은 집에서도 영어로만 대화하며 영어 실력을 키우는 데 열심이었다. ‘라이언’의 엄마는 과거 모든 과목에서 만점을 받았으나 영어는 낙제점이었고, 그로 인해 한국 사회에서 성공을 쟁취하지 못했다. 모든 말을 “Fuck you”로 대신하는 아빠 역시 ‘라이언’의 학원비에 모든 돈을 쏟았으나, 폰지사기라 불려도 무방할 정도로 거두어들인 성과가 통장에 찍힌 ‘0’과 다름없었다. 그러니 사실 ‘라이언’에겐 부모님의 강요가 없었더라도, 영어마을에 가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 살아남으려면 한국어보다 영어를 잘해야만 하므로.
백인 같은 외모에 늘 외국인으로 오해받던 ‘보타’는 평생을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이문세의 노래를 부르고 목욕탕에서 발가벗고 몸을 부대껴도” 타인에게는 이방인일 뿐이었다. LA 갱스터 출신인 ‘준’은 자신을 키워준 파파의 말에 숨겨진 의미를 찾기 위해 그리고 그를 험난한 삶에 내던진 누군가를 찾기 위해 왔다. 마찬가지로 단순히 영어를 배우고 싶다는 ‘샤오’와 ‘시게루’에게도 말 못 할 저마다의 사연이 존재한다. 소설에서 펼쳐지는 살아남기 위해 ‘영어’를 배워야만 하는 토종 한국인들과 영어권이 아닌 타국까지 온 외국인들의 서사는 이제껏 우리가 목도해온 현실을 언어로 재연했다. 물론, 영어마을에 있어야만 하는, 영어마을 성인반을 만든 ‘교장’에게도 사연은 있다. 영어마을에서 자꾸만 사고를 치는 ‘라이언’ 일행에게 교장은 퇴소 대신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바로 영어마을에 숨어든 ‘스파이’를 찾는 것. 카지노에서 마피아와 총격전을 벌이고 북한에 체류되어 김일성 전기를 외우게 된 이들의 결말이 궁금하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책을 펼치길 바란다. 웰컴 투 잉글리시 타운!
■■■ 지은이
김준녕
제5회 한국과학문학상 장편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막 너머에 신이 있다면』 『별보다도 빛나는』 『빛의 구역』, 소설집 『0번 버스는 2번 지구로 향한다』, 에세이 『사랑에 관해 쓰지 못한 날』 등을 펴냈다.
■■■ 차례
1장 붐뱁Boom bap
잉글리시, 잉글리시, 잉글리시
울트라 화이트 티스
2장 잉글리시English
오컬트 스테이
런치
클라스
스파이
파이트
파티
베이커리 숍
일라이
폴리스 스테이션
3장 트랩Trap
아이리버
팁
카지노
포커 페이스
머니
웨스턴 스파게티
DPR 코리아
옥토퍼스
주체 아이디어
프리즌 브레이크
오디세이
코리아, 코리아, 코리아
후일담
작가의 말
추천의 말
■■■ 책 속에서
완독이었을까, 오독이었을까? 개인적으로 나는 모든 사람이 오독을 하고 있다 생각한다. (29쪽)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사람들은 비명을 내지르며 경찰을 찾았다. 몇몇이 선생을 향해 달려들었지만, 선생은 개의치 않고 성인들을 가볍게 제압했다. 무협지 속 천마天魔를 실제로 보고 있는 것 같았다. (47쪽)
영어마을은 극심한 경영난을 겪고 있었다. 주 고객층인 아이들이 저출산으로 줄어든 것은 물론, 요즘에는 외국으로 유학을 가지 못한다면 차라리 인터넷 영상통화로 방에서 영어를 배웠다. 누구도 굳이 이 시골까지 버스를 타고서 영어를 배우러 오지 않았다. (59쪽)
아무리 생각해도 성인을 위한 수업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 눈치를 보았다. 한국 사회에서 다 큰 어른이 몸을 흔드는 것은 술에 취해서가 아니라면 쉽게 용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원어민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동공이 풀려 있는 것 같았다. (83쪽)
교장의 거절은 입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준이 자신의 입으로 교장의 입을 막았기 때문이다. 교장의 말은 준의 입속으로 다이빙해버렸다. 이제 눈물겨운 가족 간 상봉이 아니라 성인 에로영화 속 한 장면을 보는 것만 같았다. (107쪽)
술개미가 한국에도 존재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술에 떠 있는 불순물의 정체는 술을 마시고 취해버린 개미들이었다. 어금니에서 꿈틀거림이 느껴졌다. 손가락을 입안에 넣어 이물질을 빼냈다. 몸통이 반쯤 잘린 개미였다. (143쪽)
그렇게 십여 분이 지나서야 엉덩이로 하는 비트박스가 끝이 났다. 기어를 P로 바꿀 때도 그들은 연기를 멈추지 않았다. 주차까지 완벽하게 마무리한 그들은 차에서 내려 우리를 밖으로 끌어내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까 그 자리 그대로였다. 혼란스러웠다. 연극인가 싶었다. 가만 보니, 경찰차에는 바퀴도 제대로 달려 있지 않았다. (169쪽)
눈이 차츰 빛에 적응해가고 있음에도 내가 무얼 보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없었다. 첫인상은 라스베이거스 그 자체였다. 수십 대의 슬롯머신이 경쾌한 소리를 내며 정신없이 돌아갔고, 사람들은 룰렛 테이블을 둘러싸고서 쇠구슬의 향방에 따라 순식간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고 있었다. (203쪽)
그때 러시아인도 고개 숙이며 중국인을 향해 총을 겨누었고, 둘은 동시에 총을 쏘았다. 둘이 피를 토해내며 바닥에 쓰러지자마자 그 자리에 있던 마피아들이 한 명도 빠짐없이 총을 뽑아 들고는 서로를 향해 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피가 사방에 튀었고, 유리잔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245쪽)
준은 갑자기 발을 구르기 시작하더니, 입으로 박자를 만들어냈다. 화려했다. 킥, 스네어 드럼, 808 베이스 소리. 온몸이 신시사이저 같았다. 준은 비트에 맞춰 랩을 하기 시작했다. (264쪽)
증오로 가득 찬 보타의 눈을 바라보면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비명이 산발적으로 이어졌다. 고개를 살짝 돌려보자 준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290쪽)
영어마을 교장이 네 가족이 아니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불필요한 말이었다. 만약 준이 없었다면 영어만은 제대로 배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을 배울 수는 없었겠지. (31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