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아무도 믿지 말고 모든 것을 의심하라!
도깨비에 현혹되는 순간,
눈과 귀를 잃고 짐승의 탈을 쓰게 되리라.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이 박진감 넘치는 이야기는 오컬트와 스릴러 그리고 미스터리를 오가며 독자의 시선을 끊임없이 사로잡는다. 놀라울 정도로 생동감 있는 캐릭터와 기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치밀한 묘사,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서사가 절묘한 균형을 이룬다. 작가는 섬 하나를 배경에 두고 다양한 이야기를 능숙한 솜씨로 풀어낸다. 감히 근래 읽은 소설 중 가장 인상적이며 강렬한 작품이라 말하고 싶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나는 작가의 전작을 모조리 찾아 읽을 생각이다. 배준이라는 이야기꾼에게서 새로 탄생한 이 놀라운 작품에 박수를 보낸다.
― 전건우(소설가)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유령, 악마 등을 다루는 장르가 ‘오컬트’로 불리기 시작한 때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인간의 힘으로 온전히 막을 수 없는 ‘신’과 그 ‘신’을 모시는 인간의 세계를 엿보는 일이란 어려우며, 때로는 그 참상이 너무나 비극적이기 때문이다. 한국문학에서 지금처럼 ‘오컬트’ 소설을 보기 힘들었던 이유는 장르가 연상하는 보편적 이미지가 지극히 미국적인 것도 있지만, 우리가 선호하는 공포/호러 소설이 ‘혼’ ‘악령’ 같은 것보다 ‘귀신’에 가깝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무속 또는 민속신앙을 주제로 한 이야기가 늘어나고 선과 악의 구분이 명확해짐에 따라, ‘오컬트’ 장르에 요구되는 복잡한 이해보다 생경한 장르가 주는 신선한 재미가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마침내, K-오컬트의 부흥을 이어갈 역작이 탄생했다. 배준 작가의 장편소설 『도깨비섬: 역신의 제단』은 도깨비를 ‘요괴’가 아닌 ‘신’으로 모시는 어느 외딴섬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이야기다. ‘신’의 두 얼굴이 선사할 예상치 못한 반전과 입체적인 캐릭터, 잠깐의 틈도 허용하지 않는 서스펜스로 오컬트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도깨비’ 이야기를 기대한다면 오산이다. 신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과 한 번 싹튼 신에 대한 ‘의심’이 부딪혔을 때 들이닥칠 재앙이 궁금하다면 주저하지 말고 이 책을 펼치길 바란다.
눈과 귀가 먼 아이를 둘러싼 두 개의 믿음,
신을 향한 인간의 맹신과 불신이 불러온 재앙
주인공 ‘주영’은 대학 친구인 ‘수현’과 ‘한아’, ‘은솔’과 요트 여행을 즐기던 중 ‘은솔’의 멀미가 심해져 남해의 어느 외딴섬에서 잠시 쉬어 가기로 한다. ‘주영’은 평소보다 심한 뱃멀미에 시달리는 ‘은솔’에게서 알 수 없는 기시감을 느낀다. ‘주영’ 일행의 요트를 제외하면 고깃배 두 척이 정박해 있는 작은 섬은 외부인의 방문이 거의 없는 듯 보였으나, “키가 작은 활엽수와 여름풀로 뒤덮인” 푸르고 포근한 풍경에 안도한다. 그때, 그들은 멀리서 다가오는 무언가를 보고 제자리에 우뚝 선다. 열 살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조그만 남자아이가 아지랑이에 반쯤 녹아든 채 걸어오고 있었다. ‘주영’은 미묘한 위화감을 풍기는 아이와 시간이 지날수록 낯빛이 창백해지는 ‘은솔’을 번갈아 바라보며 다시 한번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다. ‘주영’은 그들과 거리가 완전히 좁혀졌는데도 걸음을 멈추기는커녕 뛰다시피 돌진해오는 아이에 일순 몸이 굳는다.
정확히 ‘주영’ 일행의 한가운데에 멈춰 선 아이는 아무리 인사를 건네거나 말을 걸어도 미동이 없었다. 아이를 이리저리 살피던 ‘한아’가 안타깝다는 듯 말했다. “아, 청각장애인인가 보다.” 그녀는 양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내밀었는데,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인사라는 것쯤은 어렴풋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한아’를 쳐다보지 않고 여전히 입을 꾹 다물 뿐이었다. “이 아이, 아무래도 시청각장애인인 것 같은데?” ‘주영’은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다는 이 아이가 정확히 그들을 향해 뛰어오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 순간, ‘수현’이 손에 쥔 과자 봉지의 뒷면을 다급히 펼치며 ‘실종 아동란’ 아래 사진을 가리켰다. 실종 아동과 눈앞의 아이는 너무나 닮아 있었다. ‘수현’은 아이의 손바닥을 잡아끌더니 그 위로 글자를 써내려갔고, 얼마간의 필담을 주고받았다.
“지금 같이 사는 사람들은 ‘이모’들이랑 ‘이모부’들인데, 다들 이 아이를 지칭할 땐…… ‘도련님’이라고 부른대. 실종 아동이 맞아. 우리가 데리고 나가자.” 하지만 ‘한아’는 ‘수현’의 등 뒤를 바라보며 이미 늦었다고 대답했다. 아이의 ‘이모’인 듯한 중년 여성들이 빠른 걸음으로 그들을 향해 다가왔다. 동시에 ‘은솔’이 헛구역질을 하더니 방파제 쪽으로 달려가 미친 듯이 속에 있는 모든 걸 쏟아냈다. 그녀는 몸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주영’에게 물었다.
“못 느꼈어? 저 아이, 정상이 아니야.”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깊은 어둠이 섬에 그늘을 드리웠다. 재앙이 들이닥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늘이 열리고 비바람이 거센 풍랑을 일으켰으며, 한 차례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거대한 태풍이 섬을 집어삼켰다. ‘주영’ 일행이 절대 섬 밖으로 나갈 수 없으리라는, 저주 같았다.
도깨비의 것을 탐내는 외지인들과
도깨비의 것을 지키려는 섬사람들의 숨 막히는 대립
아이가 실종 아동이 아니라는 의심을 지우지 못한 ‘수현’과 ‘주영’은 결국 아이를 데리고 몰래 섬 밖으로 나가려 한다. 그러나 어디선가 물귀신처럼 나타난 섬사람들에 의해 가로막히고, 그대로 ‘주영’ 일행은 연행되어 마을회관으로 들어간다. 아이를 ‘납치’하려 했다는 죄책감에 ‘주영’은 고개를 조아리며 어떤 벌을 받더라도 감수하겠다고 생각하는데, 외려 잔뜩 겁을 집어먹은 쪽은 섬사람들이었다. 마을 이장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은 화를 삭이듯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화를 내기 전에 너무 궁금한 거야. 멀쩡하게 생긴 학생들이 왜 이렇게 막돼먹은 일을 벌인 거야?” ‘수현’은 대답 대신 ‘실종 아동란’이 적힌 과자 봉지를 내밀었다. 그녀는 아이를 처음부터 데리고 있었다는 섬사람들에게 공격적인 어투로 그들을 자극하는 말을 내뱉었다. 그 옆에서 죄 지은 사람처럼 온몸을 떠는 ‘은솔’이 수현을 말렸으나, 그녀가 계속해서 아이를 데리고 나가겠다고 말하자 ‘은솔’이 경기를 일으키듯 소리쳤다. “제발! 그만 좀 하라고. 자극하지 말라고…….” 울먹이다시피 ‘수현’을 말리는 ‘은솔’을 보고, ‘주영’은 직감했다. 아니, 확신했다. 일이 단단히 꼬였다는 것을.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무언가를 건드렸다는 사실을.
태풍이 멎을 때까지 마을회관에 머물게 된 ‘주영’은 귓속을 찢어발기는 천둥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번개가 소리 없이 번뜩이며 하늘을 대낮처럼” 밝힌 순간, 충격적인 장면을 목도한다. 귀신에 홀린 듯 혼이 나간 ‘은솔’이 짐승의 소리를 내며 ‘수현’ 위에 올라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섬사람들이 ‘은솔’을 떼어내려 했지만 그녀의 힘은 가히 대단했다. 불안한 예감을 틀리지 않는다고 했던가. ‘귀신’을 보는 ‘은솔’이 정말 무언가에 빙의된 듯 ‘수현’을 죽이려 한 이 사건은, 앞으로 ‘주영’ 일행에게 펼쳐질 미스터리하고 기이한 일들의 시작에 불과했다.
다음 날, ‘주영’ 일행 앞에 잘 차려진 음식이 놓이자마자 독실한 크리스천인 ‘한아’는 식전 기도를 올리지도 않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댔다. 다섯 공기째 먹는 ‘한아’의 걸신들린 듯한 모습에 불쾌해진 ‘수현’이 핀잔을 주자, ‘한아’는 일순 정색하더니 말했다. “왜, 먹는 거 가지고 지랄이야.” 지금껏 알던 ‘한아’와 전혀 다르게 돌변한 모습에 셋이 당황해 멈칫거리는 사이, 갑자기 ‘한아’가 화장실로 달려가더니 먹은 것을 모두 토해냈다. 그리고 그날 밤 ‘주영’은 또 다른 소란에 잠에서 깨고, ‘한아’에게 심하게 구타당하는 ‘수현’을 목격한다. 어젯밤에 이어서 오로지 ‘수현’만을 노리는 무언가와 이유 모르게 죽어나가는 짐승이 늘어나자 마을 이장은 ‘주영’과 ‘수현’을 어느 저택으로 초대한다. ‘도련님’이라 불리는 아이가 사는, 웅장하고 을씨년스러운 그 저택으로.
“우린 무당이에요. 이 섬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도련님은 이 섬에서 모시는 도깨비를 받들기 위한 신체神體,
그러니까 살아 움직이는 신전 같은 존재예요.”
‘주영’은 그제야 여태껏 벌어졌던 일들이 하나씩 이해되었다. ‘수현’도 더는 반발하지 않고 순순히 이장의 말에 순응했다. 마을회관으로 돌아가는 길에, ‘주영’은 아이를 건들지 않겠다는 ‘수현’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아까 한 약속, 진심이지? 이제 아이 포기하는 거지?” 수현은 코웃음을 치며 단번에 답했다. “아니.” 어떤 말을 하든 ‘수현’을 말릴 수 없다는 생각에, 그들은 함께 저택에 몰래 들어갔고 잠에서 깬 섬사람 두 명을 마주친다. 소식을 듣고 저택으로 몰려온 섬사람들은 집 안에 낭자한 핏자국과 피를 흘리며 쓰러진 섬사람들 그리고 아이를 인질 삼아 칼을 들이밀며 악을 쓰는 ‘수현’을 보고서 경악을 금치 못한다. 최선을 다했다는 듯, 이제는 돌이킬 수 없다는 듯 이장은 냉소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그간 소홀했나 봐……. 그러니 이런 망조가 들지.
만약 학생이 직접 도깨비에 씌면, 그땐 믿어줄래?”
차갑게 식어버린 얼굴로, 이장은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여전히 태풍이 몰아치는 새벽, 죽은 팽나무가 놓인 신의 제단 앞에서 도깨비를 부르는 굿이 시작되었다. 과연, 그들은 노한 도깨비를 잠재울 수 있을 것인가?
“잊지 마. 죽을 수도 있어.
도깨비를 거스른다는 건 그런 뜻이야.”
■■■ 지은이
배준
2018년 제1회 자음과모음 경장편소설상을 수상했다. 장편소설 『시트콤』 『호환마마: 100일의 사투』를 펴냈다.
■■■ 차례
도깨비섬
■■■ 책 속에서
아이는 주영의 일행이 아니라 그보다 더 뒤에 있는 무엇인가를 멀찌감치 내다보는 것 같았다. 등 뒤에 뭐라도 있나 싶어 뒤를 돌아보려 했으나 그럴 겨를이 없었다. 거리가 완전히 좁혀졌는데도 아이는 걸음을 멈추기는커녕 속도를 더 높였기 때문이다. 거의 뛰어오는 수준이었다. (21쪽)
처음부터 안 보였고 안 들렸고. 다들 자기를 부를 땐 어깨를 건드리고, 대화 중에 지칭해야 할 땐 사람들이 자기를 ‘도련님’이라고 부른대. (34쪽)
빛은 하나둘 늘어나더니 그 주위가 환하게 밝아질 정도로 삽시간에 수가 늘어났다. 다해서 대략 스무 명쯤 되어 보였다. 그 인파가 우산도 쓰지 않고 홀딱 젖은 채로 물귀신처럼 살벌하게 돌진해 오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너무 무서워 오히려 웃음이 나왔다. (69쪽)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는지를 깨닫자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나이가 아직 한 자릿수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를 납치하려고 했다. 그때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78쪽)
학생들이 실종 아동이라고 생각하는 그분은, 평범한 분이 아니에요.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몸이야. 도련님은 이 섬에서 모시는 신을 받들기 위한 신체神體, 그러니까 살아 움직이는 신전 같은 존재거든요. (95쪽)
염소들은 죽은 염소의 상처 난 부위를 뜯어먹고 있었다. 부러진 뼈의 뾰족한 부분이 목덜미 살갗을 뚫고 튀어나와 있었고, 그 틈으로 비어져 나온 살을 별로 날카롭지도 않은 이빨로 어떻게든 뜯고 씹으려고 기를 쓰는 중이었다. (111쪽)
그곳에는 그냥 조그마한 자갈들로 쌓아 올린 작은 탑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주영은 긴장을 풀려다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확실히 뭔가 이상했다. 아니, 매우 이상했다. 그제야 수현이 왜 그토록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대나무는 물론이고 사람도 휘청거릴 만큼 비바람이 센데 저것들만 멀쩡했다. (123쪽)
아주 잠깐,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졌다. 압축된 정적이 거실 안을 총알처럼 스쳐 지나가자마자 한아의 몸이 주영을 훅 덮었다. 주영은 무게에 짓눌려 무너져 내리듯 쓰러졌다. 한아는 주영을 쿠션 삼아 착지하기가 무섭게 게걸스럽게 주먹부터 휘두르기 시작했다. (138쪽)
우리가 모시는 신은 비밀리에 모셔야 하는 신이에요. 존재가 외부에 까발려지면 재앙이 닥친다고 알려져 있거든. (167쪽)
여자는 질질 끌려 나오며 탭댄스를 추듯 한 다리씩 번갈아 껑충껑충 뛰었다. 수현은 일부러 유리 조각이 있는 쪽으로만 빙글빙글 맴도는 것 같았다. 슬슬 여자의 목에서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 낼 법한 소리가 나기 시작 했다. (224쪽)
만약 학생이 직접 도깨비에 씌면, 그땐 믿어줄래? (230쪽)
도깨비 탈의 퇴장 후 마당 안에는 다시 수현과 아이 그리고 하얀 탈만 남겨졌다. 주영은 여전히 쓰러진 채로 일어날 생각을 않는 하얀 탈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내 숨을 삼켰다. 하얀 탈의 허리춤에 대못 같은 얇고 기다란 막대기가 박혀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중심으로 종이에 잉크가 번지듯 하얀 옷이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247쪽)
이어서 그것이 크게 우는 소리가 수면 밑에서 한 번 더 들려왔다. 화가 난 듯한 불규칙한 음파가 귓바퀴에서 팽이처럼 빙글빙글 맴돌았다. 마침내 주영은 희망을 남김없이 상실해버렸다. (2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