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작가–작품–독자의 트리플을 꿈꾸다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23
규격화된 마음을 두드리는 진심 유쾌하게 펼쳐지는 연대의 가능성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의 스물세 번째 안내서. 등단 이후 꾸준히 어지러운 세상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고독한 사람들이 맺는 관계를 써온 작가 박지영의 첫 번째 연작소설집 『테레사의 오리무중』이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2024 현대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장례 세일」을 비롯해 두 편의 소설이 실린 이 소설집에서는 2013년 조선일보 판타지문학상을 수상하고 2022 김유정문학상 우수상, 2023/2024 현대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박지영 소설가의 씁쓸하고 유쾌하며 고독하고 다정한 세계가 펼쳐진다. |
출판사 리뷰 | 2024 현대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수록
규격화된 마음을 두드리는 진심 유쾌하게 펼쳐지는 연대의 가능성
“저는 해피엔딩이 아닌 건 참을 수가 없어요. 알잖아요? 진짜 어려운 건 누구도 다치지 않는 타협이라는걸. 그러니까, 그 힘겨운 선택을 절대 폄하해서는 안 된다고요.”
등단 이후 꾸준히 어지러운 세상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고독한 사람들이 맺는 관계를 써온 작가 박지영의 첫 번째 연작소설집 『테레사의 오리무중』이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2024 현대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장례 세일」을 비롯해 두 편의 소설이 실린 이 소설집에서는 2013년 조선일보 판타지문학상을 수상하고 김유정문학상 우수상, 현대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박지영 소설가의 씁쓸하고 유쾌하며 고독하고 다정한 세계가 펼쳐진다.
「테레사의 오리무중」은 성당 부속 센터에서 일하는 테레사가 자신의 자아를 분리할 수 있음을 깨닫고, 일하는 신체적 테레사(자신)와 꿈을 이루려는 자아(테레사)가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테레사는 센터의 중간 관리자 주경과 일하는 방식을 두고 반목한다. 주경은 테레사에게 그녀의 입 밖으로 자아가 튀어나오는 것이 보이니 주의하라고 하고, 그 때문에 테레사는 자신의 자아가 형태를 지녔음을 알게 된다. 테레사는 자아를 분리해 자신의 꿈을 실현해보려고 한다. 반복되는 일을 하는 테레사는 자아가 꿈을 이루기를 바라지만 막상 자아는 빈둥거릴 뿐이며, 급기야는 주경에게 돈을 빌려 도망치고 만다.
포장 공정을 확인하러 온 주경이 다가와 말했다. 여사님은, 마스크를 쓰시는 게 좋겠어요. 마스크를 벗고 있다는 걸 잊고 있던 터라 성 테레사는 깜짝 놀라며 마스크를 찾아 썼다. 둘러보니 여사님들 중에 반 이상은 마스크를 벗은 채 일하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만. 마스크 착용 의무가 해지된 지가 언제인데, 이것은 관리자의 갑질이 아닌가? 그것도 상급 관리자도 아니고, 기존의 중간관리자가 공석이 된 틈에 같은 작업반에 있다가 어부지리로 중간관리자 자리를 임시로 꿰차게 된 주경이 이런 요구를 한다고? 애초에 벗을 생각도 없었는데 주경이 강제하자 마스크를 쓰고 일하는 게 더없이 불편하게만 느껴졌다. 그냥 참을까 하다가 다른 여사님들도 안 쓰셔서 괜찮은 줄 알고, 하고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주경이 조용히 속삭였다. 자아가. 네? 자아가 자꾸 튀어나오려고 하던데요. 마스크로 가리는 편이 낫겠어요. (10~11쪽)
세계를 버텨나가는 자조적 개인과 비관을 어루만지는 담담한 손짓
두 번째 이야기 「올드 레이디 버드」는 계약직 영우와 미술관 정규직 학예사 정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다룬다. 큐레이터와 친구가 되고 싶어 하는 영우는 학예사 정에게 선물을 주기도 하며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영우는 정의 세계, 부유하고 평온한 세계를 동경하며 그들이 귀여워하는 고양이에게 부러움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정은 실수로 차로 고양이를 치어 죽인다. 영우는 고양이 수습을 바라보면서 정과 자신 사이에 비밀이 생겼다는 묘한 기쁨을 갖지만 그 이후 정은 영우를 피할 뿐더러, 영우의 계약직 마지막 출근 날에는 휴가를 낸다. 영우는 쉬면서 고양이를 임시 보호하다가 입양자로 나선 주경에게 고양이 테루를 넘겨주고서, 그들의 생활에 집착하다가 곧 자신이 원하는 것은 어떤 포근한 사랑이라는 결말에 이른다.
영우의 고양이는 아직 밖에 있었다. 추위와 어둠 속에. 그러니 이곳 역시 고양이가 있는 세계였다. 그리고 영우 또한 추위와 어둠 속에 길 위를 떠도는 것으로 오래 전부터 고양이가 있는 세계에 머물고 있었던 거였다. 고양이를 간절하게 좋아하지는 않는 마음 그대로도 온전하게 속한 채. 고양이는 그런 식으로 모두에게 공평했다. 나쁜 동네 산책을 하는 길 위의 사람들 곁에서, 공평한 추위와 공평한 어둠을 나누며 (132쪽)
체념을 기본으로 장착하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지극히 현실적인 ‘해피엔딩’의 세계
2024 현대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장례 세일」은 평생을 실패한 세일즈맨으로 살아온 아버지 독고 씨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그의 장남 현수가 벌이는 일종의 희극이다. 서른이 넘도록 계약직을 전전하는 현수는 장례식장에서 일하게 되는데 그곳에서는 직원 가족이 상을 당하면 30퍼센트를 할인해주는 혜택이 있었다. 현수는 평생 가난 속에서 살다 간 아버지의 죽음을 그곳에서 치르기를 바란다. 그러나 친구가 거의 없어 텅 빌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상상한 현수는, 이 서글픈 죽음을 성황리에 마무리하고자 그간 독고 씨가 일하며 관계를 맺던 이들에게 과대 광고성 죽음 세일즈를 시작한다. 그것은 아버지의 친구와 동료들에게 거짓으로 꾸민 감사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가 보낸 가짜 추억이 담긴 감사 메시지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마침내 아버지가 죽자 장례식장에는 예상보다 많은 이들이 찾아온다.
어쩌면 누군가의 ‘그래도 싼’ 인생은, 본인이 무언가를 이루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아무 관계없는, 이유 없는 타인의 완전한 선의에 의해서 다른 의미의 ‘그래도 싼’ 인생이 될 수도 있는 게 아닐까, 현수는 먹먹히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비싼 가격을 매기더라도 그래도 싸다, 그래도 싸, 라고 중얼거리게 되는 한 사람 몫의 공정. 그러니 현수뿐 아니라 그 누구도 타인과 자신의 인생에 함부로 싸구려 인생이라는 가격표를 붙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것은 결코 누구에게도 허락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게 독고 씨의 죽음은 오늘 밤, 낯설고 온전한 선의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은 ‘그래도 싼’ 죽음이 된다. (203~204쪽)
『테레사의 오리무중』에 실린 느슨하게 연결된 세 편의 단편에서 공통적으로 이어지는 특징은 세계를 바라보는 박지영 식의 날카로운 유머와 거미줄처럼 이어진 인물들의 관계다. 박지영은 각기 다른 사정을 가진 인물을 등장시켜 사람의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를 연결시켜 독자들의 삶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테레사, 영우, 현수를 보게 한다. “박지영 소설의 인물들에게 노동자로서 경험은 단순 ‘체험’이 아니라, 곧 자기의 정체성이나 자기 삶의 가치를 압도적으로 좌우하는 요소로 작동하며, 그렇기에 이들에게 ‘어떤 노동자인가’하는 물음은 자신의 일부를 넘어 전체 가치에 대한 증명과 직결돼 있다.”(선우은실_해설 중에서) 이 인물들의 삶은 너무도 희극적이고 코믹하지만, 그사이에 담긴 삶의 비애가 남기는 여운은 깊고 짙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는 테레사의 아홉 번째 자아를 함께 찾아가고, 친구가 될 거라고 착각 혹은 소망한 영우의 마음을 이해하며, 버티는 삶을 살아온 자신에게 드디어 감사 편지를 쓰게 된 현수의 결심을 읽어나갈 때, 우리는 『테레사의 오리무중』을 통해 “각각의 소설에서 종내 포기하지 않는 인간적 가치에 대한 희구” 그리고 “현실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아주 본원적인 연대의 가치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
지은이 | 박지영
201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장편소설 『지나치게 사적인 그의 월요일』 『고독사 워크숍』,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가 있다. 2013년 조선일보 판타지 문학상을 수상했다. |
차례 | 소설 테레사의 오리무중
올드 레이디 버드 장례 세일
에세이 테레사와 나의 오리무중
해설 자아를 분리한 노동자와, 그들의 연대 가능성 — 선우은실 |
작가의 말 | 여기 실린 세 단편은 문학과 나의 띄엄띄엄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백 퍼센트가 아니어도 멈추지 못하는 진심 안에서 결코 무리하지 않으면서, 욕심들 앞에서 그건 무리야, 아주 무리지, 라고
스스로에게 소설 쓰기를 계속 허락하기 위해 애써 찾아낸 주문을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아껴 쓰며 사는 일. 그것은 조금도 무리가 아닐 거라고, 나는 이곳에 쓴다. 그리고 나는 내가 쓴 것을 믿기로 한다. |
해설 | 각각의 소설에서 종내 포기하지 않는 인간적 가치에 대한 희구는 그저 ‘자본-인간’의 이분법적 도식 위에서 어느 한쪽을 점하는 것으로 기울어지지 않는다. 인물들은 ‘주경’을 중심으로 모여서 삶의 지향점을 다시 확인해나간다. 이러한 시도는 언뜻 현실의 복잡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가치’에 선(善)을 부여함으로써 기존의 구도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의구심을 발생시킬지도 모르겠다. 하나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대신, 복잡성을 가진 상태 그 자체로 한계를 일임하면서도 아주 본원적인 연대의 가치를 놓지 않는다. 이것이 주경을 통해, 또 주경을 거친 인물들을 통해 지속될 소설의 지향점일 것이다.
— 선우은실(문학평론가) |
책 속에서 | 자아를 향한 울분이 점점 악성종양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이것이 실은 기존의 자아를 향한 살해 의지를 가진 새로운 자아의 태동이라는 건 알지 못한 채 테레사는 매일 조금씩 더 분개했다. 나는 매일 과민성대장증후군에 시달리며 맘 편히 모닝 똥 한번 못 싸고 출근해서 언젠가는 그 놀라운 자아를 실현하고야 말 자매님을 위해 성실히 근로하는데, 자매님은 하루 종일 집에서 잠이나 자고 빈둥거리는 게 전부라니. 나가서 고된 노동을 하거나 사람들 틈에서 시달리며 고달프게 돈을 벌어오라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하고 싶다던 자아실현, 그 위대하고 고상하신 자아를 실현하라고 판을 깔아줬는데 왜 집구석에 틀어박혀 그거 하나를 제대로 못 하는가 말이다. (「테레사의 오리무중」, 20쪽)
주경은 알고 있었다. 그냥 알게 되었다. 왜냐하면 주경에게도 그런 기억이 있었으니까. 집안의 빚을 갚는 동안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대출업체의 전화를 받았다. 나중에는 그 전화가 싫지 않았고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빚 독촉 전화가 아니라면 내게 전화를 걸 사람도, 내 안부를 걱정하고 내가 매일 살아 있는지 궁금해할 사람도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던 때가 있었다. 그 후 주경은 대출업체의 추심 팀에서 잠깐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처음으로 자아를 두고 다니는 법을 익 혔다. 내 입에 풀칠하겠다고 입으로 지은 많은 죄들, 내 자아는 소중하다고 집에 곱게 모셔두고 타인의 자아를 손상시키기 위해 애써온 시간들, 그 시간들 속에서 주경은 다만 한 가지 기도를 했다. 늦게 갚아도 좋고 날짜를 지키지 못해도 좋아요. 대신 전화만 받아요. 잠적하지 말아요. 사라지지 말아요. 언제든 연락이 닿기만 해줘요. 살아만 있어요. (「테레사의 오리무중」, 57~58쪽)
정의 얼굴은 너무나 침착해 보였다. 그것이 충격에서 비롯된 침착함이라 해도, 그런 침착함은 영우가 생각해왔던 정의 모습과는 달랐다. 울고 당황하며 차마 죽은 고양이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는 나약함으로 영우에게 손을 더럽히는 일을 대신해달라고 부탁하고 의지해야 했다. 그런 모습을 상상했다. 상상과는 다른 정의 침착한 모습 앞에서 영우는 일종의 배신감을 느꼈다. 고양이를 좋아한다던 건 다 거짓말이었나.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죽은 고양이 앞에서 저토록 침착할 수 있나. 쓰레기를 치우듯 고양이를 폐기물 봉투에 담아 버리겠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모르는 고양이도 아니고 아는 고양이었다. (「올드 레이디 버드」, 95쪽)
영우의 손을 살짝 잡아끄는 주경의 손이 너무 차가워 영우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테루를 다시 한번 보았다. 테루는 귀여웠다. 정말이지, 진심으로 귀여워 보였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영우는 생각했다. 그것으로 되었다. 그리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가 있는 세계란 애초에 마냥 환하고 따뜻한 곳이 아니었다. 추위와 어둠 속에서라도 고양이와 있기를 선택한 사람들, 고양이에게 한 줌의 따뜻한 햇볕이 있는 요람을 마련해주기 위해 스스로에게 추위와 어둠과 불안과 긴장을, 그 책임을 허락한 사람들이 있는 곳이 고양이가 있는 세계였다. (「올드 레이디 버드」, 131쪽)
독고 씨의 묘비명을 생각하면 현수에게는 떠오르는 사자성어가 하나 있었다. 토사구팽. 그러나 그 말을 새길 기회는 쉬이 오지 않을 거였다. 묫자리도 없이 묘비만 세울 수는 없을 테니까. 어쨌거나 그것은 차차 생각해볼 일이었고, 그러자면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었다. 독고 씨의 죽음이었다. (「장례 세일」, 139쪽)
독고 씨의 죽음이 시간이 지나면 쉬어버리고 말 미역줄기무침보다 못할 것은 없었다. 독고 씨의 죽음 역시 보다 공정한 가격표가 붙을 자격이 있는 거였다. 그의 삶이 남긴 업적이 대단하거나 대단히 조명할 만한 죽음이어서가 아니라, 다만 하나의 죽음에는 그에 따른 정당한 애도의 몫이 있을 테니까. 그렇게 현수는 독고 씨의 죽음에 너무 일찍 ‘그래도 싼’ 가격표를 붙인 것은 아닌지 돌아보기 시작했고, 독고 씨의 죽음에 대한 진짜 공정한 가격은 무엇인지 다시 고심해보기로 했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날의 기억에는 이런 장면도 있었다. 현수가 먼저 집에 가려 하자 순정 씨가 민영과 먹으라며 명란계란말이와 잡채를 봉투에 담아 건네주었다. 인기 있는 반찬이어서 늘 가장 일찍 떨어지는 품목들 중 하나였다. “어떻게 이게 여태 남았어?” 현수가 묻자 순정 씨가 말했다. “남은 게 아니라 남긴 거. 너희들 먹으라고, 따로 빼둔 거.” 그러니까 아껴둔 것. 그래서인지 순정 씨가 준 명란계란말이와 잡채에는 정가도, 할인 가격표도 붙어 있지 않았다. 세상에는 그런 가격도 있는 거였다. (「장례 세일」, 162~16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