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소개 | 작가–작품–독자의 트리플을 꿈꾸다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22
닫힌 세상을 단숨에 뜯어내는 가장 빛나는 상상, 온몸으로 경험하는 신기루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의 스물두 번째 안내서.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공모전에서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로 우수상을, 제4회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에서 『시프트』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조예은의 첫 번째 연작소설집 『꿰맨 눈의 마을』이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섬뜩하면서도 독창적인 호러 소설로 많은 사랑을 받아온 작가 조예은이 이번에는 바이러스로 뒤덮여 종말을 맞이한 세계를 환상적으로 그려낸다. 갑자기 나타난 ‘저주병’으로 괴물이 되어버린 사람들과 살아남은 이들의 작은 세계인 ‘타운’에서 벌어지는 세 편의 소설은 우정과 사랑, 모험에 대한 이야기이자 세상의 모든 ‘다름’에 대한 조예은의 애틋한 전언이다. |
출판사 리뷰 | 세상을 바라보는 감은 눈의 세상
‘단 하나’를 거부하는 진짜 세상의 이야기
“나도 너와 같아. 우린 괴물이 아니야.”
2066년 6월 6일, 인류는 멸망했다. 극지방의 빙하가 80퍼센트까지 녹아 해수면이 상승해 도시가 물에 잠기고 나라가 사라졌다. 무너지면 안 되는 많은 것들이 무너졌다. 무수한 죽음과 난민들의 행렬 끝에 ‘저주병’이 등장했다. 그 병은 신의 저주라고 불렸다. 감염 경로와 방식을 전혀 가늠할 수 없었을뿐더러, 그 증상이 신이 내리는 형벌처럼 기괴하고 끔찍했기 때문이다. 저주병은 인류의 본래 모습을 앗아가는 병이었다. 사람들에게는 세 번재 팔, 두 번재 머리, 다섯 번째의 눈이 생겨났다. 운 좋게 저주병에서 벗어난 이들은 그들만의 벙커, ‘타운’을 만들었다. 타운은 선택받은 이들의 새로운 세상, 곧 ‘방주’였다. 견고하게만 보이는 방주였지만 오래된 것들에는 언제나 틈이 생기기 마련이었다. 타운의 틈은 바로 저주병이었다. 어디선가 흘러 들어온 바이러스가 타운 내부에도 감염자를 만들었다. 타운인들은 타운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인류의 보전”을 위해 규칙을 만들었다. 타운의 제1규칙, “얼굴이 아닌 곳에 난 이목구비를 보면 신고하라”.
「꿰맨 눈의 마을」은 주인공 ‘이교’가 친구인 ‘램’을 잃게 된 후의 이야기다. ‘램’은 목뒤에 두 번째 입이 생겼다는 죄로 타운에서 추방당했다. 램을 잃은 후 이교를 뒤덮은 건 친구를 잃은 슬픔과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 그리고 두려움이었다. 사실 이교에게는 비밀이 있다. 등 뒤에 세 번째 눈이 있다는 것. 이교의 눈은 태어났을 때부터 이교와 함께였다. 다만 감은 눈은 아주 작고 마치 주름처럼 보여 ‘정상인류’를 구별하는 과정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교의 부모님은 이교의 세 번째 눈을 꿰매고 옷차림을 단속하는 것으로 이교를 지켜냈다. 이교는 저주병에 걸린 채로 태어났지만 ‘여전히’ 괴물이 되지 않았다. 램의 생각에 혼란하던 이교는 램과 놀던 마을 가장자리 계곡에서 홀로 수영을 하다 낙하산을 타고 내려온 ‘람’을 만난다. 람은 타운 밖의 사람으로 홀로 경비행기를 운전하다 추락해 타운에 왔다고 한다. 이교는 람을 보고 깜짝 놀란다. 멸망 이전 구인류의 흔적이라는 비행기, 그리고 눈이 다섯 개인 소녀 람. 이교는 람으로부터 믿을 수 없는 타운의 비밀에 대해 듣게 되고, 이내 람과 함께 타운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니.” 람이 이교를 마주 보았다. 한때 저주의 표식으로 오해했던 아름다운 세 번째 눈이 자비롭게 이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교는 람의 다섯 개의 눈에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람이 말했다. “이제 비행기가 있는 곳으로 가자.” 이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덟 개의 눈을 가진 두 사람이 황야를 걷기 시작했다. (61쪽)
절망 속에서 찾아낸 희망 비관을 직시하면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계
“언젠가 견딜 수 없어지는 때가 오면, 파이를 만들어 봐.”
두 번째 이야기 「히노의 파이」는 이교가 타운을 떠나기 전, 그리고 램이 추방당하기 전의 이야기다. 이교의 삼촌 ‘백우’는 저주병에 걸린 감염자를 타운 밖으로 내보내는 문지기다. 그에게는 연인 ‘히노’가 있다. 히노는 저주병에 걸린 추방자에게 제공하는 미트파이를 만드는 조리사다. 타운인들에 따르면 미트파이는 추방자가 자신의 최후를 선택할 수 있게 하는 마지막 배려로, 그들이 괴물이 되기 전 존엄한 죽음을 선택할 수 있게 한다는 명목대로 독을 넣어 만든 것이었다. 히노는 갓난아이 때 타운의 울타리 밑에 버려져 조리사였던 ‘구 노파’가 데려와 키운 아이였다. 누군가의 가족이었던 자를 추방하는 문지기와 그들에게 줄 독이 든 음식을 만드는 조리사라는 수식어는 백우와 히노를 함께 하게 만들었다. 평화롭게 사랑을 키워가던 이들에게 변화가 생긴 것은 황야에서였다. 타운의 유일한 외지인으로 타운 밖을 궁금해하던 히노를 위해 백우가 몰래 그를 데리고 황야로 나간 것이었다. 하지만 히노는 그날 자신이 만든 미트파이를 먹고 죽어가는 추방자를 보게 되고 이내 충격에 휩싸여 스스로를 방에 가둔다. 자책하는 백우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히노의 어깨에는 날개처럼 보일 만큼 여러 개의 팔이 자라나 있다. 백우는 자신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탓하고, 히노는 백우에게 자신의 파이 레시피를 남기고 스스로 타운을 벗어난다. 백우는 그러한 히노를 원망하며 잊지 못한다. 마침내 조카 이교를 타운 밖으로 데려다준 날, 백우는 결심한다. 미뤄왔던 히노의 파이를 만들기로.
히노, 나는 그 무수한 별의 수만큼 내가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해. 우리의 손에 묻은 피와 파이를 먹은 사람들을, 그들에게서 빼앗은 시간과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걸 생각해. 우리가 지금껏 믿어온 것에 대해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 오늘은 꼭 파이를 완성하고 싶어. 할 수 있겠지? (127~128쪽)
황야의 신기루에서 빛나는 실재가 되다 마침내 감은 눈을 뜨면 보이는 ‘조예은 원더랜드’
타운에서 쫓겨난 ‘램’은 황야를 헤매다 파이를 먹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웬걸, 파이를 먹어도 램은 죽지 않았다. 램은 이제 살기 위해 움직인다. 그러다 램의 앞에 무언가가 추락한다. 작은 별이 떨어져 나온 것 같기도 한 그것은 비행기였다. 구인류의 산물이라는 비행기. 램은 추락한 비행기 안에서 발견한 물과 식량으로 삶을 이어나간다. 그리고 사진 한 장을 발견한다. 정상인류의 기준으로는 너무 적은 팔과 너무 많은 다리,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생겨난 기관들, 그렇지만 웃음이 만연한 가족사진을. 그때 조종대에서 지지직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비행기의 주인을, 또한 램을 구하기 위한 소리가.
그는 이교가 있는 꿈으로 향하며 계속해서 타운과 황야를, 끊어진 다리와 그 건너를 곱씹었다. 우리가 두려워하던 것. 우리가 믿었던 것, 우리가 저지른 일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 기억의 징검다리를 건너 꿈의 세계로 입장하면 이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꿈속의 이교에게 그 모든 걸 전부 말해주었다. 그곳을 벗어나서야 마주하게 된 타운과 황야의 진실을 말이다. 이교, 황야를 지나면 다리가 나와. 그 다리를 지나면 새로운 세상이 있어. 그러니까. “같이 가자.” (164~165쪽)
『꿰맨 눈의 마을』은 정체불명의 저주병을 둘러싼 타운의 비밀과 인물들의 성장을 그리는 연작소설이다. 환경 파괴와 기후 위기라는 인류의 오랜 문제는 세상을, 그 자신을 멸망시켰다. 빙하가 녹았기에 깊숙한 곳에 얼어 있던 고대의 바이러스들이 세상을 덮쳤다. 신의 저주인 줄 알았지만 실은 명확한 인과의 결과였고, 신화(神話)가 아닌 진화(進化)였다. 신의 저주가 아니었기에 애초에 타운은 방주가 될 수 없었다. 타운인들은 저주병을 방주에 생긴 틈처럼 여겼지만, 신의 방주였다면 생기지 않을 틈이었다. 모든 것은 인간의 선택이었고, 그들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않고자 하는 아집이 제 눈을 꿰맨 것이었다. 어쩌면 우리는 눈을 꿰맨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고 여기는지도 모른다. 제멋대로의 잣대와 편견으로 눈을 가리고 있으면서 눈앞의 세상이 진짜라고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단히 닫힌 눈을 열면 새로운 세상이 있다. 이제는 닫힌 눈을 열고 진짜 세상을 보아야 할 때다. 『꿰맨 눈의 마을』은 세상의 모든 ‘다름’에 대한 조예은의 애틋한 전언이다. 눈을 열면 보인다. “조예은의 원더랜드”가. |
지은이 | 조예은
제2회 황금가지 타임리프 공모전에서 「오버랩 나이프, 나이프」로 우수상을, 제4회 교보문고 스토리 공모전에서 『시프트』로 대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스노볼 드라이브』 『뉴서울파크 젤리장수 대학살』 『테디베어는 죽지 않아』, 소설집 『칵테일, 러브, 좀비』 『트로피컬 나이트』 『만조를 기다리며』 등을 썼다. |
차례 | 소설 꿰맨 눈의 마을
히노의 파이 램
에세이 빛나는 모형들
해설 끝나지 않는 세계의 조예은 원더랜드 ― 이다혜 |
작가의 말 | 대부분의 이야기는 가짜다. 허구는 자신을 최대한 숨기려 할 때도 있고, 있는 힘껏 드러낼 때도 있지만 허구라는 것 자체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더군다나 내가 쓰는 이야기에는 대부분 초현실적이거나 판타지스러운 요소들이 등장하니, 음식에 빗대본다면 돈가스 소스가 노란색이거나 보라색인 모형을 만드는 꼴이다.
최대한 먹음직스럽고, 진짜 같지만 어딘가 이상한, 이상해서 계속 보게 되지만 끝내 진짜라고 믿고 싶어지는 그런 걸 만들고 싶다. 나는 모형들이 좋다. 지면과 스크린 위의 진짜인 척하는 모든 이야기를 사랑한다. 그래서 일단은 계속하는 수밖에 없다. _에세이 「빛나는 모형들」 중에서 |
해설 | 조예은의 세계는 애틋하다. 무너진 세계에서도 빛바래지 않는 기이한 낭만의 흔적. 고어가 순정과 엮여들고, 죽음은 새로운 관계를 낳는다. 비극이 있어서 비로소 온전해지는 세계를 몇 번이고 경험하게 한다. 일상적인 풍경은 어떤 사건으로 완전히 짓이겨지고, 그 이후에 비로소 만나지는 세게가 주인공을 새롭게 살게 한다. ‘알 수 없음’의 세계를 유머와 낙관으로 그려 보이는 조예은의 방식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세계다.
_이다혜(작가·기자) |
책 속에서 | 물속에서 이교는 손을 등 뒤로 가져가 세 번째 눈을 더듬었다. 눈꼬리 옆으로 찢어진 상처와 꿰맨 흉터. 등 뒤에 달렸으므로 거울에 비추지 않으면 직접 볼 수 없으나, 그것은 분명 눈이었다. 얇은 눈꺼풀 안에, 척추와 등가죽 사이에 동그란 안구가 감춰져 있다. 엄마 말에 의하면 그것은 분명 이교의 눈이라고 한다. 엄마의 눈꼬리와 아빠의 눈동자 색을 가진 이교의 눈.
(「꿰맨 눈의 마을」, 26쪽)
삼촌이 램을 버리고 온 그 지점에 미트파이와 콜라 캔이 아직 남아 있는지 직접 확인할 거다. 그대로 남아 있다면, 혹은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 해도 램을 찾아 나설 거다. 무엇이 진실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직접 보고 겪어야 한다. 이곳에서 평생을 추방당할까 두려워 떨 바에는, 저 밖에 무엇이 있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겠다. 그러다 언젠가 램을 만나면 꼭 알려줘야지. 램, 네 말이 맞았어. 타운 밖에는 다른 타운이 있대. 그런데 그거 알아? 우린 사실 타운에 갈 필요가 없어. (「꿰맨 눈의 마을」, 46쪽)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니.” 람이 이교를 마주 보았다. 한때 저주의 표식으로 오해했던 아름다운 세 번째 눈이 자비롭게 이교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교는 람의 다섯 개의 눈에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람이 말했다. “이제 비행기가 있는 곳으로 가자.” 이교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덟 개의 눈을 가진 두 사람이 황야를 걷기 시작했다. (「꿰맨 눈의 마을」, 61쪽)
민소매를 입은 그의 양어깨에는 날개가 자라나 있었다. 고목의 가지 끝에 새로 자라나는 잎처럼, 빼꼼히 모습을 내민 손가락들. 손가락과 손바닥과 앙상한 팔목이 모여 그것은 흡사 반쪽짜리 날개처럼 보였다. 백우는 한 발을 내딛어 히노의 방 안에 들어섰다. 그리고 날개들이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그를 안았다. 히노에 게서는 달콤한 반죽 냄새가 났다. 히노가 속삭였다. “쿠키 만들어줄게.” (「히노의 파이」, 122쪽)
히노, 나는 그 무수한 별의 수만큼 내가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해. 우리의 손에 묻은 피와 파이를 먹은 사람들을, 그들에게서 빼앗은 시간과 그들이 가질 수 있었던 모든 걸 생각해. 우리가 지금껏 믿어온 것에 대해서. 돌아갈 수 없는 길을 너무 멀리 왔다는 생각이 들어. 그러니 오늘은 꼭 파이를 완성하고 싶어. 할 수 있겠지? (「히노의 파이」, 127~128쪽)
램은 오래된 두 개의 눈을 감고 손을 떼어냈다. 틈이 벌어지자 어둠이 아닌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그것은 등 뒤의 풍경. 자신이 쉽게 놓치곤 했던 이미 지나온 길. 램은 자신의 모든 눈을 떴다. 정면을 보고 있음에도 뒤편의 풍경이 겹쳐졌다. 앞과 뒤가 합쳐진 세계는 꼭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눈을 뜻대로 깜빡이기까지는 적응이 필요했지만, 그는 원하는 대로 세 번째 눈을 뜨고 감을 수 있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다. 그는 이 눈을 이교에게 보여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램」, 162쪽)
그는 이교가 있는 꿈으로 향하며 계속해서 타운과 황야를, 끊어진 다리와 그 건너를 곱씹었다. 우리가 두려워하던 것. 우리가 믿었던 것, 우리가 저지른 일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사건들. 기억의 징검다리를 건너 꿈의 세계로 입장하면 이교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꿈속의 이교에게 그 모든 걸 전부 말해주었다. 그곳을 벗어나서야 마주하게 된 타운과 황야의 진실을 말이다. 이교, 황야를 지나면 다리가 나와. 그 다리를 지나면 새로운 세상이 있어. 그러니까. “같이 가자.” (「램」, 164~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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