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작가-작품-독자의 트리플을 꿈꾸다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19
흩어지지 않는 말, 결정結晶을 가진 느낌
김유림의 세계 안에서만 만져지는 현실적 환상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의 열아홉 번째 안내서. 2016년 시인으로 등단해 최근 소설로까지 영역을 확장하고 있는 김유림의 첫 번째 소설집이 출간됐다. 늘 살아 움직이는 시어로 환상과 현실 사이를 거닐던 김유림이 이제 소설이란 새로운 세계 안에 그만이 구축할 수 있는 세상을 유연하고도 견고하게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갱들의 어머니』 안에 펼쳐진 세 개의 세상은 마치 시작과 끝이 이어진 무한 루프의 세계 같다. 하지만 제자리로 돌아올 때마다 느껴지는 미묘한 변화가 그 세계 안에서 수없이 존재하고 사라지는 무한한 생명과 삶과 사고를 감각하게 한다. 김유림의 손끝에서 새 의미를 획득한 언어들, 그것들이 부유하고 관계 맺는 과정, 그 과정 속에 새로이 번역되는 또 다른 언어들은 어떠한 범주와 구조를 형성하며 ‘김유림의 문학’으로 정의된다.
■■■ 작가의 말
내게 느낌은 무정형이 아니다. 느낌은 아주 명확한 시나리오를 가지고 있다. 느낌은 결정적이고 전략적이다. 이야기가 찾아오면 이야기를 이야기가 아니라 느낌이라고 받아들이려 했고, 그런 방식으로 이야기를 온전히 보전할 수 있었다. 느낌만 오는 경우는 없었다. 느낌은 뭔가를 끌고 온다. 냄새나 벽지, 껌 같은 것 말이다. 그것은 언제라도 돌아갈 수 있는 시작 지점 같은 것이다.
― 「쓰지 못한 것들」 중에서
■■■ 해설
『갱들의 어머니』는 유구한 글쓰기의 역사와 핵심적인 것을 공유하는 김유림의 ‘문제’를 무엇보다도 소설적으로 구현하는 데 집중한다. 비록 이 소설집의 소설들이 대체로 소설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해도 말이다. 그의 소설은 소설, 더 정확히는 어떤 ‘이야기’에 관해 이야기하는 소설이며, 정작 그것의 내용은 들려주지 않으면서도 용케 이야기로 머무는 소설이기 때문이다.
― 최가은 (문학평론가)
■■■ 지은이
김유림
2016년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양방향』 『세 개 이상의 모형』 『별세계』와 공저 『셋 이상이 모여』 등이 있다. 일인 출판사 말문을 운영한다.
■■■ 차례
소설 갱들의 어머니
핸드폰을 든 채로 죽으면 안 돼
두 갈래로 나뉘는 길
에세이 쓰지 못한 것들
해설 김유림의 픽션들 ― 최가은
■■■ 출판사 리뷰
쓰이지 않았기에 영원히 존재하는 이야기
존재하지 않기에 영원히 쓸 수 있는 대상
「갱들의 어머니」는 다짜고짜 소설을 쓰겠다는, 쓸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내던지며 시작한다. 「갱들의 어머니」의 주인공이 쓰겠다는 소설은 바로 「갱들의 어머니」. 그가 「갱들의 어머니」를 쓸 수 있는 이유는, 바로 그가 갱들의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갱들의 어머니가 될 것이라 예상”한 순간, “갱들의 어머니라는 걸 예감”한 주인공에겐 일반 시민으로 위장한 채 능청스레 사는 갱들을 식별해내고 거둘 만한 “소양과 재능”이 있다. 갱들도 그가 자신들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찾아온다. 마치 운명처럼.
“운명이라는 게 존재해서 운명을 믿는 게 아니라 운명이 찾아오기 때문에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런데 운명이 찾아오더라도 운명이 운명이 아닐 운명이라면 운명이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운명이 운명이라는 걸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머니인 걸지도.” (14~15쪽)
소설 속에는 ‘진짜 나’와 ‘가짜 나’가 등장하고, 제1세계와 제2세계가 제시된다. 스스로가 ‘가짜 나’인지 ‘진짜 나’인지 혼동하고, ‘진짜 나’가 ‘가짜 나’에게 잠식되고, ‘가짜 나’에게 비추어 ‘진짜 나’를 더 애착하기도 한다. 그러한 ‘나’는 제2세계에서 인생사에 통달하고, 갱들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노스탤지어에 시달리기도 한다. 때론 ‘나’와 또 다른 ‘나’의 가교가 되어 제2세계에 대해 ‘나’들에게 들려준다. 이는 모두 표현되지만 그 구분은 뚜렷하지 않다. 진짜와 가짜, 존재와 비존재, 말해지고 말해지지 않는 것, 시작과 끝이 모두 모호한 채로 남겨진다. 마치 그것들은 별로 다르지 않다는 듯이.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갱들의 어머니」 속 「갱들의 어머니」는 주인공의 일기장에 적힌 문장으로 그 존재감을 분명히 한다.
“이 소설은 쓰이기 이전에 훨씬 생생했다.” (41쪽)
말하는 것과 말해지는 말
배회를 마치며 시작되는 배회
「핸드폰을 든 채로 죽으면 안 돼」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채워진 소설이다. 마치 집의 내부 설계도를 그릴 수 있도록 구석구석을 설명하는 듯한데, 더 정확히는 말로써 구조와 요소를 그려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관문을 기준으로 오른쪽을 보면 작고 오래된 신발장이 있습니다. 다이소에서 산 작은 구둣주걱 하나를 거기 걸어뒀습니다. 그러나 이런 세세한 것까지 그림에 그릴 수는 없겠죠. 그저 작은 직사각형 하나를 오른쪽 벽면에 붙여보도록 합시다. 세로선 하나, 가로선 하나입니다.” (53쪽)
집을 채우고 있는 요소들의 출처나 사이즈, 심지어 그것에 대한 사연이나 단상까지 언급되는데, 그것이 나열되는 이유나 목적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낱낱이 집 안을 그림으로써 얻어지는 결과 또한 소설 속에선 찾을 수 없다. 어느 순간, 이것은 이대로 나열되는 것에 의미가 있음을, 어떤 결과가 되기 위한 원인값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이 모든 게 한데 모여 섞여 있는 게 아닙니다. 각자는 각자의 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자의 자리가 어디가 될지는 각자의 상호작용에 달려 있지요. 모든 걸 알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정리가 가능해지는 건 아닙니다. 어떤 것들은 수납장 속에 넣어두고 잊어버리기도 해야 하지요.” (65쪽)
하지만 이 흩어진 정보들이 마냥 단순하게 여겨지지 않는 이유는, 이 소설의 시작에 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죽고 싶었던 순간에 대한 짧은 기록”이라는 것. 심지어 “이 기록을 매번 새롭게 작성한다”고 고백한다. 모든 걸 끝내고 싶은 순간적 욕망을 뒤로하고 주인공은 다른 욕망을 좇는데, 그것은 “더 길고 지난하며 반복적” 욕망인 글쓰기다. 하지만 반복에도 변화는 있다. 분명하지 않지만 반드시 존재한다. 그것이 바로 새로운 시작, 다시금 무엇으로부터든 비롯될 수 있는 희망이 된다. 변화하는 시간을 끝으로 소설은 재시작을 알린다.
다른 길로 떠난 여행에서 다다른 같은 지점
그리 다르지 않지만 딱히 같지도 않은 현실
앞선 두 소설에서 어른거리는 형상은 「두 갈래로 나뉘는 길」을 통해 분명하게 형체를 드러낸다. 글쓰기 행위의 결과와 탐정적 주체가 그것이다. 소설가로서의 김유림이 가장 선명한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두 갈래로 나뉘는 길」에는 임시 보호 중인 개 ‘볼보’가 등장한다. 번역된 개의 말을 구실/이유로 주인공은 끊어진 두 관계(나-애인/볼보-토니)를 이으려 한다. 여기에 도움을 주는 이가 탐정이다. 번역기를 통해 나온 개의 말과 수의사 가운을 입은 탐정의 말. 그 희부연 말들은 결국 목적을 달성하며(토니를 찾아내며) 선명해진다. 그리고 볼보, 토니와 함께 거니는 길을 통해 소설은 또다시 끝과 연결된 시작을 꺼내 보인다.
“내가 그 작은 가게의 존재를 알아챈 것은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로 다시 돌아왔을 때였다. 모든 게, 모든 반복이 자연스러웠다. 혹시나 해서 처음에 선택하지 않은 다른 길을 택했지만 길은 결국 바다로 이어졌다.” (110쪽)
소설 속엔 소설 「민을 잃어버림」 「토니가 말하길」이 등장한다. 이 소설들은 ‘소설과 실제’ ‘환상과 현실’을 자연스레 이으며 ‘소설 속 소설 세계-소설 세계-소설 밖 현실 세계’를 잇는다. 소설 속 인물들을 잇는다. 무엇이 실제고 무엇이 환상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비존재도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비현실에서도 현실처럼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게 사실인지 아닌지 모른다고, 그런 것도 모르면서, 그런 것도 모르기 때문에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143쪽)
어긋나는 시공간을 통과해 돌아오는 제자리
그럼에도 언제나 다른 대답을 내놓는 삶에 대하여
김유림은 이렇듯 끝이 아닌 끝, 현실과 다름없는 환상, 말하지 않음으로써 꺼내어지는 말, 쓰지 않았지만 존재하는 이야기 등을 소설 속에서 구현한다. 모순적이고 궤변 같으면서도 심지가 분명하고 일관된 말하기를 소설로서 해내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어떤 “결락”, 그것을 잊지 않으려는 또는 어떻게든 메우려는 강박이 존재한다. 이 책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최가은은 “김유림에게는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문학적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는데, 결국 메워지지 않는 소설 속 결락과 결코 해소되지 않는 김유림의 문학적 문제는 그 결을 같이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이 소설이 영원히 끝나지 않으리란, 김유림의 이야기는 언제까지나 이어지리란 기대를 갖게 한다. 그만이 펼쳐낼 수 있는 이 작지만 특별한 세계 속에 진입해 김유림식 ‘순환’에 몸을 맡겨보길 권한다.
■■■ 책 속으로
갱들은 아이보다는 성체(成體)에 가깝다. 갱들은 매번 얼굴이 바뀌지만 매번 정확히 같은 사람이다. 사람이 전혀 아니지만 사람일 수밖에 없다. (「갱들의 어머니」, 23쪽)
기억나는 건 갱들이 갱들이고 싶어서 갱들이 되는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들은 원해서 갱들인 것도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안 원하는데 굳이 갱들이 된 것도 아니었다. (「갱들의 어머니」, 29~30쪽)
내가 갱들의 어머니가 될 수 있을까? 내가 이미 갱들의 어머니임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미래에 일어날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사실이다. 이미 펼쳐져 있다. (「갱들의 어머니」, 40~41쪽)
짧은 글을 고치고 또 고친다. (……) 부끄럽기 때문에 고친다. 글이 부끄러운 게 아니라 글을 쓰는 자기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에 고친다. 차라리 글이 부끄러웠다면 좋았을 텐데……. 한결같이 자기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자신이 가짜 같기 때문에 혼란스럽다. (「갱들의 어머니」, 46쪽)
미묘한 변화는 존재하지만 분명한 변화는 존재하지 않아야 하지요. 그래야만 이 종이 안에서의 뒤틀린 만남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핸드폰을 든 채로 죽으면 안 돼」, 71쪽)
표면은 무언 중에 많은 걸 강요하지만, 많은 걸 강요한다는 인상은 적게 전달합니다. 단지 나는 그런 사람일 뿐이고, 단지 그런 그림이나 그런 이미지, 그런 글, 그런 바깥이 그런 식으로 흘러간 것뿐이니까요. (「핸드폰을 든 채로 죽으면 안 돼」, 71쪽)
특정한 대상에 머무르기 위해, 혹은 머무르지 않는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 너무 많거나 너무 적은 시간을 낭비하는 인간은 매우 소설적입니다. (「핸드폰을 든 채로 죽으면 안 돼」, 74~75쪽)
낡은 것 혹은 낡음이야말로 성취하기 어려운 것이고, 따라서 새로운 즐거움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움보다는 낡음에서 발생하지요. 새로운 대상에게서 결코 충족될 수 없는 것은 낡음에 대한 황당무계한 욕망입니다. (「핸드폰을 든 채로 죽으면 안 돼」, 76쪽)
보드라운 개의 머리가 내 머리와 가볍게 겹쳐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서 손을 들어 내 뒤통수를 가만히 만졌다. 희미한 감응이란 이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갈래로 나뉘는 길」, 84쪽)
우리는 어디에나 있고, 그러나 어디에나 있어서 어디에도 없는 게 되어버리는 그런 것. 그런 것처럼요. 잊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살아 있는 건 맞는 것 같아요. 교환되는 건 없으니까. (「두 갈래로 나뉘는 길」, 11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