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여름

저자1 김은
저자2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일 2023-07-14
분야 한국소설
정가 1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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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비틀린 세계를 구석구석 비추는 시선으로

틔워 올린 사랑과 자유의 실마리

김은 첫 소설집

정연하고 민감한 시선으로 인물과 그 세계를 명징하게 구축해온 소설가 김은의 첫 소설집 『사랑의 여름』이 출간되었다. “실제 사건을 테마로 하여 치밀한 구성력을 선보였다”(『작가세계』 심사평)는 「바람의 언어」를 비롯해 여덟 편의 이야기가 담겼다. 김은의 세계를 관통하는 감각은 “애석하게도 우리가 삶에서 끝끝내 발견할 수 있는 건 온갖 종류의 ‘알 수 없음’ 즉, 모호함”(해설, 염승숙)이다. 작가가 부려 놓은 이 모호한 세계의 삶들은 각기 다른 인물의 다채로운 삶들로 펼쳐지고, 그 주인공과 독자 모두에게 아릿한 통증으로 와 박힌다. 그 통증은 우리가 체념하려 하나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종류의 것이다.

이 위협적인 세계에서 살아가는 지친 사람들, 제 몫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주는 힘은 무엇인가. 현재의 우리를 비추고 발견하는 것이 소설이 지닌 강력한 힘이라고 할 때, 김은은 한 발 더 나아가 그곳에서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한다. 가족과의 불화나 친밀함에서 파생된 일상적인 갈등들이 우리 삶의 파편화된 일상을 조망하고, 그 일상은 냉연하게 우리의 눈앞에 펼쳐지지만, 삶이 지속되는 한 길은 하나가 아니며 한 걸음의 발자국으로 우리가 선회할 수 있음을, 이 소설의 세계는 단호하게 증명해나간다.

 

■■■ 책 속으로

“여름 산이 원래 이렇게 무서운 거야. 한 달만 사람 발길이 닿지 않아도 금방 수풀이 우거지거든.”

그렇게 말하고는 아버지는 커다란 전지가위로 구멍을 오려내듯 가지들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의 어떤 말도 신뢰하지 않지만, 산은 정말로 무서운 재생력을 가진 듯했다. 나무를 잘라내고 또 잘라내도 가지들은 계속해서 나타나 우리 앞을 가로막았다. (9~10쪽)

 

할머니는 귤을 까느라 노랗게 물든 내 손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세숫대야에 미지근한 물을 담아 가지고 왔다. 그러고는 거즈로 된 손수건에 비누를 묻혀 손마디와 손톱 밑까지 깨끗이 닦아주었다. 나는 간지러운 듯 자꾸만 손을 오므렸는데, 아마도 그때 느꼈던 감정은 부끄러움이었을 것이다. 부모로부터 세심하게 보살핌을 받지 못한, 방치된 아이의 손.

“사람은 무엇보다도 손 간수를 잘해야 하는 법이다. 그래야 누구도 너를 함부로 대하지 않거든.”

할머니는 물에 불어 손끝이 쪼글쪼글해진 내 손의 손톱을 자기와 똑같이 둥근 모양으로 잘라내면서 말했다. (36쪽)

 

가까이 다가온 남자는 한층 더 나이 들어 보이고, 한층 더 지쳐 보였다. 뜨거운 태양 볕에 빨갛게 익었을 줄만 알았던 남자의 얼굴은 추위에 떨다 온 사람처럼 창백했다. 입술도 파랗게 질려 있었다. 성욱은 남자의 상태가 걱정됐지만 다른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애써 모른 척했다. 심한 갈증을 느끼는지 남자는 마른침을 힘겹게 삼키고는 “혹시 이번 시합이 끝난 후에 저도 한 게임 할 수 있을까요?” 하고 물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여기까지 찾아오느라 무척 고생을 했고, 무엇보다도 자신은 꼭 스매싱을 멋지게 성공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71~72쪽)

 

“수선 씨, 이달의 친절 으뜸이로 뽑히는 거 아니야?”

부러움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을 때, 그 문제의 사건이 일어났다. 동료 하나가 선물은 작은 거라도 함께 나눠야 하는 법이라며 수선 언니의 손에서 초콜릿을 빼앗아 포장을 뜯었다. 그런데 초콜릿 겉 포장지 안쪽에서 반듯하게 반으로 접힌 5만 원권 지폐 네 장이 나왔던 것이다. 정확히 앞으로 할아버지가 받게 될 한 달 치 생계지원금이었다. 동료는 절대로 손대지 말아야 할 위험한 물건이라도 되는 듯 그것을 손에서 떨어뜨렸다. (96쪽)

 

그들은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들처럼 서로의 언어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것은 태어나 처음 듣는 이국의 언어처럼 모호하고 어려웠다. 그래서 그들은 벙긋대는 서로의 입술만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가끔 그 입술에서 어떤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아무 의미도 갖지 못했다. 그것은 소음에 불과했다. (124쪽)

 

“너 사는 게 뭔지 아니?”

잠시 물통에서 입을 뗀 오빠가 물었다.

“사는 거?”

“그래, 사는 거.”

뜬금없는 질문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감정을 애써 누르듯 오빠의 얼굴이 경직돼 있었다. 나는 음…… 하고 한동안 생각을 입 안에서 공그른 다음 입을 열었다.

“먹는 거? 자는 거? 먹고 자는 거?”

“아니, 틀렸어.”

“그럼?”

“날마다 조금씩 쓸모없어지는 거야.” (142쪽)

 

유리병은 크기도 내용물도 제각각 달랐다. 그러나 정상적인 모습을 가진 것은 하나도 없었다. 머리와 꼬리의 위치가 뒤바뀐 입벌레, 오른쪽과 왼쪽 날개의 크기가 확연히 다른 나비와 나방, 머리가 두 개 달려 몸통이 비좁아 보이는 파리, 탈피가 반만 진행된 나비의 애벌레, 집게 없는 사슴벌레, 앞다리 없는 사마귀 등등. 어떤 건 한데 엉키고 일그러져 본래의 모습을 알아보기 힘든 것도 있었다. (177쪽)

 

에덴농장이라는 이름처럼 닭들의 천국이라고 불리는 농장은 넓고 쾌적했다. 하지만 나는 농장 밖의 세상이 궁금했다. 곳곳에 뚫린 환풍구를 통해 보이는 회색 시멘트가 깔린 넓은 마당과 가끔 농장을 구경하기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이 머물다 가는 단층 건물이 내가 아는 세상의 전부였다. (19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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