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 소개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일상은 당연한 것일까?
1년 내내 비가 내리는 미래의 서울,
가장 더럽고 척박한 곳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자음과모음 105번째 청소년문학 『범람주의보』가 출간되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비가 오는 미래의 서울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듯이 깨끗한 곳이 생기려면 그곳의 오물을 버리는 더러운 곳이 생기기 마련이라는 점을 꼬집는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마주하는 편의 시설들과 깨끗한 거리는 과연 당연하게 누려야 하는 것들일까? 보이지 않는 것들을 외면하고 살아도 되는 걸까? 소설은 하나의 질문에서 파생되는 여러 현상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본다.
계속해서 비가 내리는 세상, 사람들은 날씨에 적응하기 위해 ‘누비스’라는 방수 시스템을 개발했다. 해가 들지 않는 세상에서 인공 햇빛을 쐬며 청결에 목숨을 건다.
혜인이 또한 그런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또래처럼 학교가 끝나면 학원 뺑뺑이를 돌고, 일광욕을 하고, 누비스를 제 몸처럼 사용했다. 그랬던 혜인이의 인생은 누비스와 모든 편의 시설을 거부하고 다리 밑에서 비를 맞으며 생활하는 할아버지로 인해 송두리째 뒤바뀐다. 할아버지는 혜인이에게 일반인들이 편하게 살기 위해 소수의 사람들이 어떤 짓을 했는지, 그리고 그 여파로 지옥 같은 삶을 살고 있는 통협동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혜인이는 점차 자신이 누리고 있었던 생활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깨달아 간다.
그러나 혜인이의 부모님은 다리 밑에서 살아가는 할아버지가 노망이 났다며 양로원에 가둬버린다. 혜인이는 통협동에서 알게 된 아이와, 배가 아파 입원했을 때 병원에서 만난 할머니 수향 씨와 함께 할아버지 구출 작전을 세운다. 과연 혜인이는 무사히 할아버지를 구출할 수 있을까?
■■■ 출판사 리뷰
양로원에 억울하게 갇힌 할아버지를 구출하라!
혜인이와 여민이, 그리고 수향 씨의 무모한 구출 작전
그 뒤에 숨겨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야기
할아버지가 양로원에 갇혔다. 까다로운 입소 절차는 ‘노망이 났다’는 말 한마디에 너무나도 쉽게 해결됐다. 혜인이는 부모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는 늘 할아버지에게 화만 내고 아빠는 할아버지가 앞에 있어도 마치 없는 사람처럼 엄마에게만 말을 걸곤 했다. 혜인이는 할아버지를 이해하고 싶었다. 할아버지의 편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결심한다. 할아버지의 양로원 구출 작전을.
혜인이의 할아버지는 일반적인 시선에서 보면 좀처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너무나도 양심적인 나머지 회사가 통협동에 오수를 버린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 죄책감에 시달리다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다. 그 이후로도 그들의 아픔을 되새기고자 다리 밑에서 불편하게 지낸다. 누구나 사용하는 방수 시스템인 ‘누비스’조차 사용하지 않는다. 통협동에 오수를 버리기 시작한 회사에서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혜인이는 다리 밑 강물이 불어날 때마다 이제는 희귀 아이템이 되어 버린 ‘우산’을 들고 할아버지를 맞이하러 가야 했다.
역시나, 할아버지는 내가 그렇게 부르자마자 원하던 대로 입을 뗐다. 실은 좀 과하게 뗐다. 수향 씨를 향해 냅다 주절거린 것이다. 맞아요, 내가 그래요, 사람이……. 그래서 가족들이 해 준다는 것도 마다하고 속만 썩이고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할까 미안하긴 한데 내가 마음이 불편하거든요, 이 비를 이렇게 쉽게 안 맞을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그 방법이 점점 많이 퍼지면 사람들은 점점 비를 맞을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잊게 될 거예요, 비를 맞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걸 모르고 믿지 않게 될 겁니다, 그래서 나라도 안 하려고 합니다…….
_P.39~40
한편, 통협동에서 살며 혜인이의 할아버지를 ‘서가 할아버지’라고 부르며 친할아버지처럼 따르는 소년 여민이는 또래보다 어른스럽고 차분한 성격을 지녔다. 여민이는 자신을 포함한 통협동에 살고 있는 이들의 아픔을 누구보다도 뚜렷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통협동의 아이들이 태생부터 달고 태어나는 화상 같은 무늬, 가난하고 더러운 동네.
“서가 할아버지한테 얘기 많이 들었어.”
서가 할아버지. 그 호칭이 너무 낯설어 눈만 굴리고 있는데 성여민이 다시 덧붙였다.
“할아버지 손녀라고 해서 꼭 할아버지처럼 나를 좋아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날 혐오해도 돼. 많이들 그러니까.”
전혀 상상하지 못한 말이라서 나는 정말 깜짝 놀라고 말았다.
_P.90
처음에 혜인이는 여민이를 보고 깜짝 놀라지만 점차 피부에 새겨진 무늬가 ‘살라맨더’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이후로 혜인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기억할 것. 당연하다는 생각을 버릴 것. 그들을 위해 움직일 것.
“내게 이슬이란, 노망과 같은 층, 같은 자리에 위치하는 단어.”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을 조명하다
『범람주의보』를 관통하는 큰 주제는 ‘이타적인 마음’이다. 타인의 일을 나의 일처럼 생각하고 그들을 배려하며 기억하는 것.
혜인이는 서울의 진실과 통협동의 모습을 접하고 충격을 받는다. 그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은, 학교에서조차 배우지 않는 그들의 이야기. ‘저런 사람들’이라며 늘 타자화되고 일반인들과 섞이지 못하는 이들. 어딘가에 존재하지만 그동안 모르고 살았던 것들이었다. 혜인이는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보이지 않도록 양로원에 가둔 ‘노망’난 이들, 그리고 비가 내리지 않는 새벽에만 볼 수 있는 ‘이슬’.
수향 씨가 흰 머리를 쓸어넘겼다. 손에 물기가 약간 남아 있어 머리에 방울방울 물이 맺혔다. 나처럼 검은 머리 위였다면 티도 안 났을 텐데, 새하얀 머리카락에 붙어 있는 물방울들은 정말 잘 보였다. 풀잎에 맺힌 이슬처럼. 물론 나는 이슬이란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건 24시간 내내 비가 오지 않는 땅에서야 관찰이 가능한 아름다움이니까. 문학 교과서에서나 본 그런 개념이다.
그러니 내게 이슬이란, 노망과 같은 층, 같은 자리에 위치하는 단어.
_P.57
『범람주의보』는 보이지 않는 이들을 잊지 말자며 따뜻한 손길을 건넨다. 우리가 이렇듯 아무 일 없이 살고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각고의 노력을 다하고 있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평범함’ 속에 가려진 이들은 어디든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타인을 위해 움직이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혜인이와 할아버지, 그리고 여민이, 수향 씨는 기꺼이 타인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한다. 주변의 것들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며 부조리를 바로잡으려 노력한다. 비록 작은 몸짓이라 순식간에 세상을 바꾸지는 못할지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의 ‘양로원 탈출 대작전’은 하나의 큰 날갯짓이었다. 이 세상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자들이 있다는, 작은 나비의 큰 날갯짓.
그들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 비로소 조화로운 세상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 지은이
설재인
2019년 《내가 만든 여자들》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내가 만든 여자들》 《사뭇 강펀치》, 장편소설 《세 모양의 마음》 《붉은 마스크》 《너와 막걸리를 마신다면》 《우리의 질량》 《강한 견해》 《내가 너에게 가면》, 에세이 《어퍼컷 좀 날려도 되겠습니까》가 있다.
■■■ 차례
프롤로그
1~29
에필로그
작가의 말
■■■ 책 속으로
엄마는 할아버지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옆에서, 그저 당신 신념이 조금 많이 강하실 뿐 장인어른은 좋으신 분이야, 하고 말한다. 그렇지만 우습다. 나는 아빠가 할아버지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사실을 아주 옛날부터 확실히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아빠는 원래 혼자서 착하고 고고한 척을 다 하는 사람이지만 나는 아빠가 종종 쓰곤 하는 가면 같은 걸 아주 잘 파악한다. 피를 물려받은 딸이라 그런지.
_10쪽
할아버지는 우산을 자꾸만 내 쪽으로 씌우려 했다. 할아버지, 나 누비스 있다고! 나는 비 안 맞는다고! 빛이 나는 손목을 두드리며 소리를 쳐도 그래 그러냐, 하고 우산을 물렸다가는 30초도 되지 않아 다시 슬그머니 내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할아버지는 누비스를 사용하지 않았다. 거부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세상에 그런 건 존재조차 하지 않는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것 같았다.
_19쪽
“할아버지는 어디 계신다고?”
“금꽃길양로원.”
“어디 있다고?”
“저 멀리, 경상북도에.”
“얼마나 자주 찾아뵙는다고?”
“한 달에 한 번씩 주말마다. 아니 근데 엄마, 이건 좀 아니야. 내가 주말 내내 학원 뺑뺑이 도는 거 우리 반 애들은 다 아는데? 다른 애들이 담임한테 나랑 같이 학원 다닌다고 말하면 거짓말 뽀록 나는 거 5초도 안 걸릴 텐데?”
“……그럼 너는 화상으로 맨날 인사드린다고 해.”
“엄마, 근데 담임이 이런 것까지는 안 물어봐. 담임 나한테 별 관심 없어.”
“혹시 모르니까 외워 두고 있으라고. 그리고 강이나 다리 얘기는 절대 하지 말고.”
“아니, 담임 입에서 그 얘기 나올 일이 뭐가 있어 진짜…….”
그러면 엄마는 소리치는 것이었다. 얘가 왜 이래, 환장하겠네! 하라면 해! 너 엄마 인생 망하게 하려고 작정했지, 그치?
_28~29쪽
퇴원하기 전날 한 번 더 수향 씨에게 머리를 감겨달라고 했다. 염치없게도 그런 짓을 했다.
“나 젊을 땐 물 부족 국가라고 어지간히 광고했는데.”
“근데 지금은 물이 너무 넘쳐나서 문제잖아요.”
“그러게. 물이 하늘에서 내리지 않는 날을 본 적이 있어?”
샴푸 거품 섞인 물이 눈과 입으로 들어왔다. 나는 입을 꾹 다물고 물이 턱 밑으로 떨어지길 한참 기다렸다. 당연히 본 적 없다고 말해야겠지만, 이번에는 내가 수향 씨보다 먼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저 같은 나이대 애한테 어떤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그런 거 물어보면 무슨 얘기 듣는 줄 알아요?”
“무슨 얘기?”
“노망났다고.”
_56쪽
학교에도 가끔씩 ‘사고’를 치는 애들이 있었다. 가장 최근에 크게 문제가 되었던 건 아무래도 그 애였다. 뾰족한 송곳을 들고 다니면서 ‘불특정 다수’의 손목을 찔러 경찰에 끌려갔던 애. 그러나 그 애는 소년원에 가기는커녕 전학이나 정학 처분도 받지 않았다. 여전히 어깨를 으쓱이며 학교를 돌아다녔다. 어린 나이에, 정신과 진료 기록이 참작되었으며 피해자들과 ‘충분히’ 합의를 봤다고 했다. 걔는 영리했다. ‘불특정 다수’라니. 말도 안 된다. 걔는 우리 동네가 아니라 저지대에서 그 짓을 저질렀다. 그래서 용서받았고 없던 일이 되었다.
_115쪽
나는 아까 보았던 수화기를 들었다. ‘면회 시 불편한 점이 생기면 누르세요^^!’라는 문구 아래에 ‘접수처’라고 쓰인 버튼이 붙어 있었다. 그걸 눌렀다. 뚜, 뚜, 뚜. 세 번 연결음이 울리고서는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나는 소리쳤다. 여기 면회실인데요. 우리 할아버지가 왜 이렇게 말랐어요?
전화를 받은 이는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왜, 우리가 굶길까 봐서? 그러더니 덧붙였다.
“부모님이 말씀해 주셨을 거 아니니, 여기 오시는 어르신들, 앞가림 제대로 되는 분들이 아니라는 거. 다 알고 온 거 아니야?”
그렇지.
노망났다고 했지.
_146~147쪽
세상엔 어쩔 수 없이 힘들어야만 하는 사람도 있다. 아직 녹슬지도 침수되지도 않은 감각기를 가지고 태어난. 그들은 자신의 감각기가 느끼는 바를 적은 후 흐르는 물에 띄워 세상으로 내보낼 것이다. 종이에는 적을 수 없다. 비를 맞지 않는 사람들이 쉽게 쓰는 종이는 젖어 해지고 찢어지기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종이배 같은 건 안 된다. 성여민이 하던 것처럼 누군가 버린 판자를 가져와서, 비닐을 씌워, 단단하게 만들어야 한다.
단단하게 만들었다고 스스로를 믿어야 한다.
_186쪽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결코 그 기준은 바뀌지 않았겠지. 변하는 건 자연이고 기준을 세워 서로를 줄 세우는 것은 인간이다. 비는 계속 내릴 것이다. 무시무시하게 많이 내릴 것이다. 이 비는 이미 이전 세대의 방관에 대한 천벌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배웠듯 정말로 책임이 많은 사람은 그 행위를 통해 이미 충분히 부유하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을 것이다. 아마 누비스의 온갖 시스템을 이용하며 편한 삶을 살겠지. 그러면서 사람들은, 그리고 누비스는 또다시 잘못된 일을 저지르고 그로 인한 피해자들을 낳겠지. 더 큰 천벌이 찾아오고,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은 계속 바뀌는데, 결국 잘사는 사람은 계속 잘살겠지.
_2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