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의 자리 (트리플 18)

저자1 이주혜
저자2
출판사 자음과모음
발행일 2023-05-31
분야 한국소설
정가 12,000원

도서구매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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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 소개

작가작품독자의 트리플을 꿈꾸다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 18

 

내 자리는 어딘가요?”

세상의 모든 자리 없는 이들을 위한 애도의 이야기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만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자음과모음 트리플 시리즈]의 열여덟 번째 안내서. 2016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경장편소설 『자두』(창비, 2020)와 소설집 『그 고양이의 이름은 길다』(창비, 2022)를 발표하고 꾸준히 여성과 가부장에 대한 시선을 던져온 작가 이주혜의 두 번째 소설집 『누의 자리』가 출간되었다.

『누의 자리』는 자리 없는 ‘누’들을 부르는 호명의 이야기다. ‘누’는 누구의 옛말, 의문형 인칭대명사 혹은 막연한 사람을 가리키는 대명사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남으로써 ‘누’는 사라지고, 이주혜는 텅 빈 ‘누’의 자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누’는 ‘너와 나’. 이주혜는 ‘나’가 ‘너’가 되는, 또다시 ‘너’가 ‘나’가 되는 세 편의 소설을 통해 ‘우리’라는 이름으로는 자리가 허락되지 않은 이들을 위한 환대의 장을 마련한다.

 

■■■ 해설

이주혜의 소설들은 여성성에 근거해 여성에 부여된 자리들에 대한 고발이자 자리 없는 여자들에 대한 구원의 이야기이다. 우리라는 이름으로는 자리가 허락되지 않으며 죽음 이후에도 자리를 얻지 못한 여자들에 대한 애도의 이야기인 것이다. 너와 나의 자리, 우리라는 말 속에 언제나 남아 있는 허위의 영역을 소거한 채로 너와 나를 위한 자리를 마련하고, 그 자리에 이름을 붙이고자 하는 시도가 『누의 자리』를 통해 수행된다.

_소영현 (문학평론가)

 

■■■ 책 속으로

‘우리’는 용량이 큰 말이야. 우리의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너무 많기도 하고 하나도 없을 때도 있어. 나는 우리 속에 들어간 적이 별로 없어. 누구도 나를 우리라는 이름으로 환대해주지 않았어. 네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넌 달라. 넌 나를 우리라고 불러주었어. 그런 너를 흔한 말 속에 가두고 싶지 않아. 바흐친이 그랬어. 각 단어는 서로 다른 방향의 사회적 힘들이 충돌하고 교차하는 하나의 작은 무대라고. ‘누’라는 무대에 오직 너와 나, 단 두 사람만 올리고 싶어. 이제 ‘누’는 너와 나만을 위한 단어야.

(누의 자리, 24~25)

 

구멍은 좁고 길어야 한다. 제법 깊이 박힌 원통 속 흙을 모두 파내고 거기에 질척거리는 너의 재를 부었다. 이제 파낸 흙을 다시 채우고 흔적을 지울 차례다. 수백 년 동안 왕을 기다렸던 빈자리 한 귀퉁이가 이제 너의 자리가 될 것이다. 너는 이곳에서 왕을 따돌리고 느긋해진 한 여자와 나란히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휴식할 것이다. 나는 사계절 내내 이곳을 찾아와 너와 함께 산책할 것이다. 그러면 비로소 이곳은 누의 자리로 완성될 것이다.

(누의 자리, 31~32)

 

마스터가 추천하는 레드와인을 세 잔째 청하고 나서 나는 두 가지 설 중 어느 쪽이 하이스미스의 의도에 가깝다고 생각합니까? 네게 물었다. 너는 이번에도 한참을 생각해보다가 대답했다. 하이스미스가 소금 기둥이 되어버린 롯의 아내를 떠올렸다면 그것은 소설 속 캐롤과 테레즈의 고통에 집중했기 때문이겠지요. 만약 「마태복음」 구절에서 제목을 따온 거라면 고통보다는 사랑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이 아닐까요? 소금은 짜야 한다. 그게 소금의 값이고 소금의 대가이다. 캐롤과 테레즈의 입을 빌리면 이런 말이 되겠지요. 이 사랑은 고통이다. 그게 이 사랑의 값이고 대가이다. 소금은 짜서 소금이고 이 사랑은 고통이지만 끝내 사랑이다.

(소금의 맛, 50~51)

 

너의 번역은 무엇을 향하고 있을까? 알 길이 없어 나는 절망했다. 교실 너머로 벌써 해가 지는 게 보였다. 하늘의 뺨이 붉어지고 있었다. 노을에 대고 너의 이름을 몇 번 불렀다. 잠시 후 나는 노트북에 창을 두 개 분할해서 띄웠다. 하나는 영어 원서 전자책, 또 하나는 한글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그날 교문이 굳게 닫히는 것도 모르고 늦도록 『소금의 값』 원서를 내 식으로 번역했다.

(소금의 맛, 65)

 

누구도 내가 아이를 버린 게 아니라고 말해주지 않았다. 누구도 내가 지은 죄에 비해 너무나 과도한 벌을 받았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나를 낳고 키워준 친정 엄마마저도 이혼 직후 친정에 와 누워 있는 내게 혼잣말인 듯 중얼거렸다. 그러게, 어미가 되어서는 왜 그렇게 일 욕심을 부렸어.

(골목의 근태, 95~96)

 

나는 여전히 커튼 너머를 투시할 듯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고, 다만 서두르지 말고 쉬엄쉬엄 오시라고, 당신이 찾아오면 나는 반가워 개방 정을 떨 거라고 대답하는 대신이었다. 커튼이 살짝 일렁였다. 전나무인지 눈보라인지 대신 대답한 모양이었다.

(골목의 근태,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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