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되돌려도 너무 되돌린 것 아니냐고요!”
『두메별, 꽃과 별의 이름을 가진 아이』 범유진 작가의 타임 슬립 역사 판타지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104권이 출간되었다. 104권 『내일의 소년 어제의 소녀』는 타임 슬립이라는 흥미로운 소재에 실제 존재했던 ‘김금원’이라는 여성을 등장시킨 새로운 방식의 역사 판타지 소설이다.
뜨개질을 잘하고 좋아하는 남자아이, 태웅. 태웅은 같은 반의 최민석에게 ‘남자답지 못하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좋아하는 아이인 이하은과 아이들 앞에서 강제로 치마를 입게 돼 등교 거부를 하게 된다. 그러던 중 엄마와 함께 원주 성황림으로 여행을 간 태웅은 해설사의 이야기를 듣다 여서낭에 걸린 거울을 만지고, 조선 시대로 타임 슬립 하게 된다. 그곳에서 태웅은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 금원을 만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함께 여행을 떠난다. 과연 태웅은 조선 시대에서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또 금원은 바라던 대로 시인이 될 수 있을까?
뜨개질하는 소년과 시인이 되고 싶은 소녀,
이무기가 잠든 호수를 향해 여행을 떠나다
『내일의 소년 어제의 소녀』 주인공 태웅은 멋지고 강했던 아빠의 죽음 때문에 ‘남자다움’에 집착하는 중학교 1학년이다. 어느 날 태웅은 뜨개질을 하는 취미를 같은 반 ‘인싸’ 최민석에게 들키고 만다. 다음 날, 최민석에게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태웅은 최민석이 시키는 ‘챌린지’를 거부하다 강제로 치마를 입게 된다. 그 모습을 모두에게 보인 태웅은 등교 거부를 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엄마와 함께 원주 성황림으로 여행을 갔다가 조선 시대로 타임 슬립을 하고, 시인이 되고 싶어 하는 당찬 여자아이, 금원을 만난다.
친구가 된 태웅과 금원은 태웅이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함께 찾기 시작한다. 이후 태웅은 뜨개 인형의 도움으로 금강산에 있는 이무기가 살던 호수에 가면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금원과 함께 금강산을 향해 여행을 떠난다.
“장자께서 말씀하셨지. 군자는 순수하게 사귄 사람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돕는다고.”
“……무슨 뜻이야?”
금원은 양손을 허리에 척 얹고는 선언하듯 말했다.
“너와 내가 친구라는 뜻이지.”
“친구?”
“그래. 지금부터 우린 친구야. 어머니가 알면 다 큰 여자애가 어떻게 남자하고 친구 할 생각을 하냐고 기절하시겠지만 말이야. 네 말대로라면 네가 여기 와서 처음 만난 게 나잖아? 그건 내게 너를 도우라는 하늘의 뜻이 있었던 거 아니겠어?”
금원이 웃었다. 태웅도 얼결에 따라 웃었다.
_본문 중
“우리, 우리답게 살자.
남자답게, 여자답게, 그런 말에 묶이지 말고,
뭘 못한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이 책의 주인공들은 어딘가 독특하다. 현대에 살고 있는 태웅은 다른 남자아이들과 달리 뜨개질이 취미고, 조선시대에 사는 금원은 보통 여자아이들처럼 수를 놓고 얌전하게 있기보다는 책을 읽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여자에게는 금기시된 시를 짓고 싶어 한다.
“금원이 넌 하면 안 되는 일 중에 뭐가 제일 하고 싶어?”
“나는…….”
금원의 어깨가 크게 위로 올라갔다. 금원은 숨을 뱉어 내며 말했다.
“일단은 시 동인 만드는 거.”
“시 동인?”
“모여서 시 짓고, 여기저기 구경도 다니는 거야. 문집도 내고.”
_본문 중
사실 『내일의 소년 어제의 소녀』에 나오는 ‘금원’은 여성이라는 성별의 제약을 뛰어넘어 14세에 홀로 금강산 유람을 떠나 많은 것을 본 실제 인물이다. 훗날 『호동서락기』라는 책으로 자신의 발자취를 기록하기도 했다. 저자는 ‘남자다움’에 얽매여 있는 태웅을 ‘여자다움’의 굴레에서 주체적으로 벗어나려 하는 금원과 만나게 해, ‘남자다움’ ‘여자다움’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그 안에서 빠져나와야 오히려 더 넓은 세상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맨박스에 갇히면 개인의 취향을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적 틀 안에 밀어 넣게 됩니다. 단 걸 좋아하는 남자도, 단 걸 좋아하지 않는 여자도 그 박스 안에 들어앉은 사람에게는 이상한 존재가 되어 버리는 거지요. 하지만 정말 이상한 건 누군가요? 곰곰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_작가의 말 중
시시각각 많은 것들이 바뀌어 가고 있는 세상이다. 하지만 ‘남자답지 못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최민석처럼, 그리고 그 밑에서 스스로를 자책하던 태웅처럼 ‘○○다움’에 갇혀 있는 청소년들도 아직 많을 것이다. 『내일의 소년 어제의 소녀』를 읽으며 청소년들이 ‘남자다움’ ‘여자다움’이 아닌 ‘나다움’에 대해 인식하고, 서서히 맨박스 속에서 나오는 태웅처럼 더 커다란 미래를 향해 걸어갈 수 있기를 바란다.
범유진
창비 신인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두메별, 꽃과 별의 이름을 가진 아이』 『우리만의 편의점 레시피』 『아홉수 가위』 『카피캣 식당』 등이 있으며, 다양한 앤솔러지에 참여하고 있다. 틈새에 쭈그려 앉아 밖을 보며 글을 쓴다.
소년과 소녀, 만나다
남자다운 남자
소원을 이뤄 주는 나무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없대도
금강산에 가야겠어
내가 여자니까!
내가 만나러 갈게
어떻게든 가고 만다!
드롭 더 비트, 김삿갓과의 만남
나는 네가 충분히 강하다고 생각해
이무기가 잠든 호수
빛나는 달의 문을 열다
우리, 우리답게 살자
내가 미래의 너를 찾아냈어
작가의 말
사흘간의 장례식 기간 내내, 태웅은 아빠의 말을 곱씹으며 울지 않고 버텼다. 강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엄마를 지켜야 한다고.
‘강해져야 해. 아빠처럼 남자답고, 힘센 사람이 되어야 해.’
그날부터 태웅은 태권도 학원을 더 열심히 다녔다. 키가 크려고 우유도 많이 마시고, 싫어하던 멸치와 시금치도 먹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태웅의 키는 좀처럼 자라지 않았다. 초등학교 3학년 겨울부터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봄까지 삼 년간 고작 3센티미터가 컸을 뿐이다. 주변 친구들이 머리 하나쯤 더 커지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속이 상했다.
_14쪽
최민석은 자신이 ‘남자답지 못하다’고 낙인찍은 애들에게 챌린지를 시켰다. 반 여자애들을 상대로 이상한 행동을 하게 한 뒤에, 그걸 휴대폰으로 찍어서 동영상 사이트에 올리는 거였다. 때로는 여자애들 몰카를 찍어 오라고 시키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괴롭힘을 당한 아이를 협박했다.
“지금은 얼굴 가리고 올렸지만, 원본 나한테 있는 거 알지? 선생님한테 이르기만 해 봐. 네 얼굴 나오게 올릴 거야. 그럼 너 몰카범으로 경찰에 잡혀갈걸?”
괴롭힘 당하는 아이도, 챌린지 대상이 된 아이도 최민석의 교묘한 덫에 걸려 괴로워했다.
_17~18쪽
“그런 거 아냐. 나, 진짜 대한민국에서 왔어. 조선에 대해서 아는 게 많지가 않아서 물어본 것뿐이야.”
“또 거짓말.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없대도.”
여자아이의 시선이 태웅이 꺼내 놓은 물건에 가 닿았다. 여자아이의 입술 모양이 슬그머니 원래대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지도를 집었다.
“어머나!”
지도를 펼치면서 여자아이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이렇게 정교한 지도는 처음 봐. 쓰인 지명이 내가 보던 것과 좀 다르기도 하고. 그래, 네 말대로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있을 수도 있겠어. 내가 전 세계의 나라를 모두 아는 것은 아니니까.”
_41쪽
“도령이 실을 사려고? 왜? 수라도 놓게?”
“이 사람도 참. 사내가 무슨 수를 놔! 남자답지 못하게!”
봇짐장수들이 껄껄 웃었다. 봇짐장수들의 웃음소리가 커질수록, 태웅의 얼굴은 점점 더 새빨개졌다.
‘조선 시대에도 남자가 뜨개질하는 건 이상한 일인가 봐.’
얼굴로 피가 모두 몰린 듯했다. 창피한 기억이 태웅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당장 어디로든 도망치고 싶었다.
“그게 어때서?”
점주의 한마디에 봇짐장수들의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_82쪽
“나는 내가 이해가 안 돼. 자기가 원해서 치마를 입는 남자들도 있어. 그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데 왜 나는 고작 치마 입은 걸로 이렇게까지 충격을 받은 건지 모르겠어. 내가 너무 한심해.”
태웅은 고개를 푹 숙였다. 금원이 태웅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무슨 소리야. 자기가 좋아서 입는 거랑, 남이 억지로 입히는 거랑 같아? 태웅이 넌 치마를 입어서 충격을 받은 게 아냐. 폭력에 진 것 같아서, 그게 화가 난 거지.”
폭력에 졌다. 태웅은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도저히 풀지 못했던 어려운 문제의 답을 알아냈을 때처럼.
_106쪽
“너 진짜 미래에서 왔든지 달에서 왔든지 해야겠다. 어떻게 김삿갓을 모를 수가 있어? 방랑시인 김삿갓! 급제를 했는데도 벼슬자리에 나가지 않고 전국을 떠돌면서 시를 짓는 사람이야. 권력자를 비판하는 통쾌한 시를 짓는 걸로도 유명해. 나 김삿갓 시 정말 좋아하거든. 김삿갓의 시라고 알려진 건 다 읽었어. 어제 주막에서 본 그 시 짓는 솜씨! 그걸 보면 분명해.”
김삿갓 이야기를 하는 금원의 목소리가 점점 열의에 차올랐다.
‘어제 삿갓 아저씨가 시를 읊을 때 좋아하는 연예인 보는 것처럼 봤던 게 착각이 아니구나.’
태웅은 금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삿갓이 준 금속판을 살펴보았다.
‘이게 뭘까?’
_134~135쪽
“우리 약속하자.”
금원은 태웅의 눈을 응시하며 한 음절 한 음절 힘주어 말했다.
“우리, 우리답게 살자. 남자답게, 여자답게, 그런 말에 묶이지 말고, 뭘 못한다는 생각도 하지 말고. 또 누가 그런 말로 너를 괴롭히면 나를 기억해. 알았지?”
“뭐야, 다시 못 만날 것처럼.”
_169쪽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금원은 존재하지 않는 아이고, 타임 슬립 같은 건 한 적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태웅은 마주 잡았던 손의 온기와 금원과 함께했던 모험, 금원이 건넸던 말들 모두를 없던 일로 여기고 싶지 않았다.
‘할머니 말대로라면 금원을 만나는 게 내 소원이었던 거야. 금원처럼, 내게 용기를 주는 사람을.’
_17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