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새의 시간에서 만난 꿈과 환영의 이야기,
찰나의 마음을 기록하는 순환의 여정
한국문학의 새로운 작가들을 시차 없이 접할 수 있는 자음과모음의 [트리플 시리즈], 그 열여섯 번째 작품으로 양선형 작가의 『말과 꿈』이 출간되었다.
『말과 꿈』은 2014년 등단 이래 꾸준히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온 양선형의 세 번째 소설집이다. 스스로를 ‘불친절한 작가’라 말하는 양선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수하고자 하는 소설에 대한 깊은 고집을 담았다.
표제작인 「말과 꿈」에서는 주인공 ‘그’가 꿈에서 만난 말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그린다.
어느 날 ‘그’는 ‘녀석’의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발견한다. ‘녀석’은 아주 유명한 경주마가 되어 있었다. 스크린 너머로 ‘녀석’을 마주한 순간. ‘그’는 신비로운 일을 경험한다. 과거 교통사고 이후 ‘그’의 “머릿속을 떠다니던 어슴푸레한 환영”이 ‘녀석’의 모습으로 조각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녀석’이 사라졌다고 한다. 일전에는 ‘녀석’이 ‘그’를 찾아왔으니 이번에는 ‘그’가 녀석을 위해 움직일 차례였다. “약속을 지켜야만 한다는 감각이” ‘그’를 에워쌌다. 결국 ‘그’는 ‘녀석’이 사라진 곳, 활주로로 가기 위한 여정을 시작한다.
“그때부터 녀석의 이미지는 그의 기억 한가운데 새겨진 공백의 모양에 들어맞는 마지막 퍼즐 조각, 그가 망각으로부터 돌려받은 아주 각별한 퍼즐 조각이 되었다.” (「말과 꿈」, 26~27쪽)
「너구리 외교관」 속의 미스테리한 숲에 사는 너구리들은 숲의 모든 존재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인 ‘그’는 몸에 큰 상처를 입고 누군가 알려준 길을 따라 너구리들이 모여 있는 산장 앞에 도달한다. 하지만 산장 주인이자 촛불 관리인은 촛불과 너구리를 제외한 모든 것에 관심이 없다. 촛불 관리인의 외면 속에 ‘그’는 열리지 않는 문 앞에서 죽어간다.
하지만 너구리들이 다친 ‘그’를 안쓰럽게 여겼고, 촛불 관리인을 설득하여 ‘그’를 집 안으로 들어가게 한다.
그러므로 산장의 잠긴 대문 앞에서 기절할 것 같은 통증을 느끼고 있는 그와 촛불 관리인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수 있는 존재란 오직 너구리들인 것이다. 너구리만이 그를 산장 안으로 입장하게 할 수 있고, 촛불 관리인의 가능할지 모를 보호의 손길을 성사시킬 수 있다. (「너구리 외교관」, 16쪽)
소설집의 마지막 수록 작품인 「「퇴거」와 나중에 함께 묶인 다른 산문들」은 소설과 에세이의 형식을 세 편의 글이 결합해 있는 특이한 형식을 가진 작품이다.
소설의 첫 부분인 2018: 「퇴거」’와 마지막인 ‘2024: 「퇴거」에 관한 소설’에는 ‘나’와 ‘친구’가 등장한다. ‘나’는 ‘친구’가 자신의 집을 함부로 쓴다고 생각하면서도 대가 없이 자신의 집에 머물게 하고, 먹이고, 돌본다. 그러나 동시에 ‘친구’가 자신의 집에서 ‘퇴거’하기를 원하기도 하는데, 글이 끝날 때까지 친구의 퇴거는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는 ‘2022: 지난 계절의 일기’를 지나 ‘2024: 「퇴거」에 관한 소설’에 도달하면서 “상상의 형태로 우회 및 지연시키던 미래가 현재를 정말로 엄습하고 점령”(해설, 윤아랑 평론가)해버리고 만다.
“시간은 레이어를 만든다. 그것들은 격자처럼 반듯하지 않고 연꽃 모양의 프릴이나 수면 위로 퍼지는 동심원처럼 하늘거린다. 때때로 그것은 왜곡된 흔들림이다. 그러나 모든 흔들림은 확장되거나 통과하거나 침투하거나 사라지면서 새롭게 반복되는 흔들림의 궤적일 뿐 어떤 형상에 대한 왜곡으로 읽힐 수 없다.” (「「퇴거」와 나중에 함께 묶인 다른 산문들」, 209~210쪽)
“양선형의 소설은 내일(혹은 어제)을 기피하고 두려워하며, 반대로 “현재를 잡”으려는 데 더없이 열성적이다. 그리고 여기 『말과 꿈』에 실린 각각의 소설들은 현재에 대한 양선형의 열정을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육화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말과 꿈』은 현재의 소설가가 쓴 현재를 위한 소설집인 것이다.”
—윤아랑(문학평론가)
‘글쓰기’라는 선형의 궤도에서 어디에서도 시작되지 않았고, 모든 곳에서 시작된 소설, “달리는 말을 타고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는 말의 잔등 위가 소설 자체의 영원한 목적지가 되는 바로 그런 소설을 쓰게 될 거”라는 작가의 말처럼 『말과 꿈』은 ‘소설 쓰기’에 대한 양선형의 집요한 애정을 담고 있다.
양선형
1990년 광주에서 태어났다. 2014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감상 소설』 『클로이의 무지개』가 있다.
소설
너구리 외교관
말과 꿈
「퇴거」와 나중에 함께 묶인 다른 산문들
에세이
「말과 꿈」에 관한 소설
해설
틈새의 시간, 되찾은 현재―윤아랑
촛불 관리인의 입장에서 너구리 전령의 외교술에 넘어가는 일은 지금껏 착실하게 쌓아온 고독의 금자탑을 무너뜨리라는 거북한 요구에 가깝다. 그가 죽어도 괜찮아. 통증으로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숨이 끊어져도 나는 몰라. 하지만 너구리야, 네 애교를 뿌리치는 일은 너무 힘들구나. 너구리 전령이 엉덩이를 흔들며 촛불 관리인 주위를 얼쩡거린다. 촛불 관리인은 그만 너구리 전령의 모습에 유혹되고 만다.
_「너구리 외교관」, 16~17쪽
그는 녀석처럼 자신을 둘러싼 비자발적인 흐름을 기꺼이 중단시킬 수 있는 이들을 사랑했다. 녀석은 공항의 스케줄을 마비시키는 방식으로 경마장 바깥의 세계를 항해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활주로는 종마를 방목할 들판으로서는 터무니없이 광활한 공간이었지만 녀석은 그곳을 그렇게 사용했다.
_「말과 꿈」, 24쪽
그 순간, 그는 머릿속을 떠다니던 어슴푸레한 환영이 구체적인 형상으로 조각되는 느낌을 받았다. 신비로운 일이었다. 그때부터 녀석의 이미지는 그의 기억 한가운데 새겨진 공백의 모양에 들어맞는 마지막 퍼즐 조각, 그가 망각으로부터 돌려받은 아주 각별한 퍼즐 조각이 되었다.
_「말과 꿈」, 27쪽
그는 말을 찾는 일에 실패했으나 실패했다고 말할 만큼의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집에서 택시를 타고 공항에 이르러 예정에도 없던 항공기에 탑승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동안 녀석의 일생이 저물었고, 그는 애초부터 약속일 수 없었던 일방적인 약속과 결별했던 것이다. 긴장이 누그러지며 졸음이 몰려왔다. 그는 꿈을 꿨다. 그가 다른 나라의 지상에 안착할 때까지 지속될 꿈이었다.
_「말과 꿈」, 112쪽
나는 최근에 「쓰레기 천사」라는 제목의 소설을 다른 사람에게 읽히지 않을 목적으로 써서 내 블로그에 비공개로 게시했다. 타인에게 읽히지 않는 것이 목적이니 벌써 이 소설은 자신의 목적을 온전히 달성한 셈이다. 이런 글쓰기는 거의 유희에 가깝지만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이러한 유희를 지속하는 일이 나의 긍지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_「「퇴거」와 나중에 함께 묶인 다른 산문들」, 154~155쪽
글쓰기란 자신에게 강제력을 부여할 공인될 수 없는 조항들이 빽빽하게 적힌 어떤 문서를 직접 발명하는 일인 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서술하면 나의 글쓰기가 훗날의 나에 의해 함부로 부인되거나 폐기되지 못할 어떤 계약 서를 작성하는 일과 유사하게 여겨진다. 나는 내 집을 내 집이 아니라 내 친구가 실종된 장소로 인식하겠다는 퇴거 명령에 사인하고, 내 집을 점유한 친구의 환영에게 주거할 권리를 보장하는 등기 서류를 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_「「퇴거」와 나중에 함께 묶인 다른 산문들」, 19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