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미래, 비인간적인 일상을 통해
인간다움을 고찰한다
네오픽션 ‘ON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으로 SF 단편 앤솔러지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가 출간되었다. 첫 SF 단편을 선보이는 작가의 작품이 다수 포함되어, 이제 도약하는 신진 작가 특유의 기발하고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거침없이 폭발시킨다.
인공 뇌를 이식받은 변호사가 슈퍼 인공지능 판사의 법정에서 활약하는 「인간의 대리인」, 상대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는 기계로 노사분쟁을 해결하려는 실험을 다룬 「스키마 리셋터」, 거침없는 할머니와 건방진 휴머노이드의 우정 이야기 「나와 올퓌」, 인간의 정신을 컴퓨터에 업로드하기 위한 도전 「정신의 작용」 등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에 수록된 작품들은 대담하고 흥미로운 소재를 SF 세계관을 기반으로 자유롭게 표현한다. 근미래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가상세계 등 비인간적인 소재를 참신하게 조명한 이번 앤솔러지를 통해 독자는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무엇일지 되돌아봄과 동시에 SF를 읽는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세계, SF
한계 없는 상상력이 빚어내는 색다른 즐거움
공상과학소설, SF에서 항상 기대되는 것이 있다. 바로 ‘재미’, 즉 ‘읽는 즐거움’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상상이든 그것이 실체화된 현실이 SF 소설 속에 존재하고, 그게 디스토피아적 비극이든 유토피아적 희극이든 우리는 그 세계를 접하는 것 자체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작가의 상상력에 놀라움을 느낌과 동시에, 그 상상력의 기반이 바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는 동시대적 ‘현실’이기에 낯선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은 언제나 현실을 비추는 창구이며, 특히 SF소설은 광각으로 굴절되는 프리즘처럼 작금의 현실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다채롭고 흥미롭게 비춰낸다.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의 아홉 작품도 각기 현실의 바람 혹은 불안이 투영된 세계를 그리고 있다.
「인간의 대리인」에서는 인공지능이 ‘인간성을 존중’하는 공정한 재판을 진행한다. 「스키마 리셋터」기계의 힘으로 의견이 쉽게 관철되어 누구도 격렬히 분쟁할 필요 없는 세상을, 「나와 올퓌」에서는 휴머노이드와 차별 없이 대등한 우정을 나누는 것을 꿈꾼다. 「영원」은 진정 아이를 위하는 양육자가―그것이 휴머노이드라도―아이를 보살피는 세상을 이야기하며,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는 빈부격차에 따른 감정적 경험의 불균등함이 만연해진 부조리한 세계를 보여준다.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는 기준이 모호한 도덕을 법으로 강제하는 전체주의 사회를 경고하며, 「대통령의 자장가」는 인공자궁 기계로 인해 임신 방식을 선택할 수 있게 세계이다. 「정신의 작용」에는 누군가와 함께하고 싶은 인간 본연의 바람이 담겨 있으며, 「미래 죽음」은 정해진 시스템 같은 운명 속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근본적 의심을 그린다.
현실을 비추는 상상의 세계, SF
현시대의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낸 특별한 스펙트럼
이렇듯 현실의 바람과 불안에서 싹튼 상상의 세계는 결국 본질적인 의문으로 가지를 뻗어나간다. 의견 대립이 없는 세상이 있을 수 있을까. 양육자의 자격이란 무엇일까. 도덕을 법제화할 수 있을까. AI와 인간의 정신을 구분할 기준은 뭘까 등 현실과는 전혀 다른 SF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현시대의 쟁점이 되는 질문을 예리하게 던지며 독자로 하여금 흥미를 가지고 고찰하게 한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의 특이성을 엿보는 즐거움, 자유로운 색채로 그려지는 현시대의 흥미로운 화두들을 살펴보는 재미.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의 수록작들은 신진 작가들의 날 선 상상력과 대담한 주제 의식을 통해 그러한 SF소설의 두 가지 중심 줄기를 충실히 담아내고 있다.
신조하
영어영문학을 전공하고 현재는 변호사로 밥벌이를 하는 중. 언젠가 스페이스 오페라를 쓰는 것이 꿈이다.
유이립
환상문학웹진 『거울』, 괴담 전문 레이블 ‘괴이학회’ 소속. 발표작으로 단편소설 「돼지가면 놀이」 「피그말리온넷은 왜 다운됐는가」 「하트 투 하트」 「비극의 주인공」 등이 있다.
임하곤
퀴어한 인물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과학문화 전문인력 양성 과정 스토리텔러 부문 2기 우수상, 한국크리에이터진흥협회 ‘제1회 SF 초단편 콘테스트’ 우수상 등을 수상했다.
최희라
「영원」은 처음 쓴 SF이자 처음으로 발표하는 소설이다. 각 장르의 전통을 경애하면서도 그에 한계를 긋지 않는 글쓰기를 하고 싶다.
이세형
장르문학 플랫폼 ‘브릿G’에서 활동하며 여러 분야의 소설을 연구하고 시도하고 있다.
클레이븐
환상문학웹진 『거울』 필진. 괴상한 괴물들과 기괴한 배경 속에서 발버둥 치는 주인공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리는 것을 좋아한다. 장편소설 『FTL에 어서오세요』, 단편소설 「마지막 러다이트」 「컴플레인」 등을 냈다.
강윤정
2018년 한일 웹툰 공모전 판타지 스토리 당선, 2021년 카카오페이지 NEXTPAGE 7기에 선정되어 현재 장편소설을 준비 중이다. 매체를 횡단하며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는 게 꿈이다.
이성탄
한국과학소설작가연대 회원. 장르소설과 영화를 좋아한다. 장편소설 『단 한 명의 조문객』, 단편소설 「따끔한 맛」 등을 냈다.
안리준
감춰진 세계에는 완전한 질서가 있다고 믿는다.
신조하 인간의 대리인
유이립 스키마 리셋터
임하곤 나와 올퓌
최희라 영원
이세형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
클레이븐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
강윤정 대통령의 자장가
이성탄 정신의 작용
안리준 미래의 죽음
어쨌든 강강약약. 해파리야, 오늘도 하는 데까지 해보자.
_17쪽, 「인간의 대리인」 중에서
엄정하게 지원자들을 선별했다. 이들 모두 행동과 생각, 사고방식이 쉽게 예측 가능하기에 뽑았다. 확실히 컨트롤 가능하다. 이들은 대파업이라는 극단적 갈등 상황 속에서 스키마 리셋터를 통해 상황을 풀어나갈 것이다. 이 정도 긴박한 상황쯤 돼야 본인의 실험 스케일에 맞는다.
_52쪽, 「스키마 리셋터」 중에서
“어차피 휴머노이드는 방전돼도…….”
“내겐 기억이 사라진다는 게 곧 죽음이다.”
희한한 대답이었다. 소유자의 요구에 따라 꼭 인간처럼 따로 기억을 백업해두지 않는 휴머노이드가 꽤 많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죽음’이라니?
_87쪽, 「나와 올퓌」 중에서
“박사님, 저는 아무와도 헤어지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죠. 저도 알아요.”
“그럼, 언제까지나 함께할 수는 없는 거니까. 선생님도 지금까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헤어진 친구들이 많아.”
(……)
“인피와는 영원히 헤어지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저는 나중에 무한 배터리를 개발할 거예요. 인피가 한순간이라도 멈추지 않게요.”
_127쪽, 「영원」 중에서
여자는 사과를 하기에는 감정적으로 지쳐 있었다. 미안한 마음과 응어리진 우울감을 모두 토로하고 싶었지만 너무 벅찬 일이었다. 망설인 끝에 여자는 남자에게 문자메시지를 전송했다. 여자의 심리 상태를 분석한 AI가 자동으로 생성한 문자메시지를.
_166쪽, 「감정을 할인가에 판매합니다」 중에서
라면과 만두를 함께 먹는 것은 새로 비도덕적 범주에 편입되었다. 몸에 해롭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안전을 위해 차도에서 15센티미터 떨어져서 걷지 않으면 경범죄로 처벌된다는 조항이 신설되었다. 심지어 김치는 민족 자긍심을 위해 국내산 재료만 써야 하며, 위반 시에는 15년 이상의 금고형에 처한다는 조항도 있었다.
_195쪽, 「도덕을 도매가에 팝니다」 중에서
“그런데 왜 그놈이 겨우 이런 정보를 언론에 공개하라고 한 건지 이해가 안 갑니다.”
“어떻게 하면 대통령의 지지도를 떨어뜨릴지 아는 거겠죠. 그래도 납치범 요구치고는 꽤 가벼운 축이지 않나요? 만약 내 손가락이라도 잘라서 보내라고 했다면 어떻겠어요? 그나마 이 정도 요구로 그쳐서 다행 아닌가요.”
_227~228쪽, 「대통령의 자장가」 중에서
“저는 오히려 AI에 대한 회의가 우울증의 원인 같습니다. 요새 학계에서는 AI가 인간의 뇌신경망은 이미 완벽하게 베꼈고 그 이상을 본다고 하는데, 저는 정말로 인간 지능을 따라잡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팀장님은 정말 AI가 사람같이 느껴지세요?
_259쪽, 「정신의 작용」 중에서
나는 내가 본 걸, 아니 체험한 걸 믿지 않을 수 없었다. 눈앞에 놓인 잔을 들어 물을 마셨는데 누가 옆에서 ‘아니야, 넌 물을 마시지 않았어. 잠깐 졸았고 그사이 물을 마시는 꿈을 꾼 것뿐이야’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의 말을 믿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손에 남은 잔의 감촉과 잠시나마 식도를 차갑게 한 물의 존재를 믿는 게 훨씬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겪은 일이 정확히 그랬다.
나는 미래가 죽고 말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_302쪽, 「미래의 죽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