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가 당선되면서 등단한 김이정 장편소설. 집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선욱은 입사동기로 만나 10년 넘게 친구로 지내온 문경의 동생에게 문경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를 받는다. 그가 알려준 병원의 영안실. 선욱은 문경의 동생 문호로부터 문경이 한가한 도로에서 사고가 났으며 남편이 있는 여자가 동승자였다는 사실, 그리고 사고 당일이 집에 열흘 가까이 연락이 없이 잠적해 있던 끝이었다는 사실을 듣게 되는데…
김이정
숭실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하고, 1994년 문화일보에 단편소설 「물 묻은 저녁 세상에 낮게 엎드려」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저서로 소설집으로 『도둑게』, 장편소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와 『물속의 사막』이 있다.
1960년, 산으로 둘러싸인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외국처럼 낯설던 제주도와 저녁이면 온 하늘이 홍시처럼 붉어지는 충청도 바닷가를 두루 뛰어다니며 자란 것을 큰 축복으로 생각한다. 서울에 올라온 후, 더 이상 뛰어놀 데가 없어 들어간 마을문고에서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을 보며 세상에는 아이들만을 위한 책도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 책들을 읽으며 내가 커서 작가가 될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소설을 쓰는 사람이 되었다.
-작가의 말
-프롤로그
1. 벚꽃 개화 예상도
2. 허공의 길
3. 길 위에서 길을 잃다
4. 사구
5. 상처, 혹은 공포
6. 지문
7. 우물
8. 전이
9. 희고 딱딱한 구멍
10. 파구
11. 집, 갇힌
12. 물속의 사막
-에필로그
사랑을 할 땐 누구나 생에 대해 진지해진다.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대신 제 자리를 맴돌며 자신의 심연을 들여다보게 만든다. 명확했던 모든 것들이 불분명해지는 대신 찰나를 통찰하는 혜안을 얻게 된다. 사랑하는 동안, 우리는 타인에 너그러워지는 대신 자신에게는 몹시 가혹해진다. 해서 고통은 더욱 예리해진다.
합일의 사랑으로도 치유되지 않는 생의 본질적 고통에 관한 섬세한 작품, 김이정의 [물 속의 사막]-
사랑, 그것은 사막처럼 황폐한 삶의 싱그러운 오아시스인가?
한 여자가 있다. 그녀의 이름은 이현. 예쁜 딸아이와 반듯한 남편과 자유기고가라는 직업을 가진 서른다섯 살의 여자. 젊은날의 아픈 기억 때문에 욕망을 거세한 듯 살았으나 그녀 안에는 욕망과 생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숨어 있었다. 다만 관계에서 오는 위험을 두려워했을 뿐.
“혼자 하는 섹스는 안전하다. 그것이 쾌락이든 고통이든, 예측할 수 없는 요구에 송두리째 몸을 맡겨야 하는 무한대의 욕망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안심이다.…관계가 가져다 주는 행복이나 불행은 어쩌면 환상이 유지되는 순간까지만 가능한 것인지도 몰랐다. 이현은 그 사실을 공교롭게도 결혼 2주년이 되는 날 깨달았다.”
결혼 기념으로 남편이 사온 와인을 따르는 순간 그녀는 금단의 한 구석을 보아버린 듯 비정하게 깨닫는다. 매끄럽게 유지되고 있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세트를 세워놓고 찍은 텔레비전 속 광고 화면과 다르지 않음을. 그렇게 부족할 것 없이 평화롭고 안정된 삶이 송두리째 거짓으로 느껴지던 날들의 어느 하루, 우연히 한 남자를 만나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든그녀는 결국 남편에게 딴 남자가 생겼음을 고백하고 집을 떠난다.
한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문경. 능력 있는 아내와 귀여운 아이들이 있고 작은 회사를 갖고 있는 서른아홉 살의 남자. 모형 비행기를 날리며 하늘을 날고 싶은 꿈, 도피 대신 현실에 발붙이게 해주는 그 꿈을 꾸며 간신히 고단한 삶을 지탱하고 있는 그는 우연히 한 여자를 만나 처음으로 자신을 열고 제 안에 타인의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인다.
“누군가를 받아들여본 기억이 없다. 타인이란 언제나 적절한 거리를 두고 바라봐야 하는 풍경일 뿐이었다. 그 거리를 유지하지 못한다면 언제 서로를 할퀴는 흉기가 될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들. 누군가와 하나가 될 수 있다거나 하는 생각은 꿈에서조차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위태롭고 불안한 사랑에 발목을 붙잡혀 허둥대면서도 그는 더욱더 그 여자 이현에게 집착한다. 잠적해 버린 이현을 바닷가 마을에서 찾아낸 문경은 그녀와 함께 서울로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두 사람은 화장된다.
그러나 물 속에도 사막이 있다.
사랑, 또는 사람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가 있다. 죽음이 아니면 끝낼 수 없는 고통이 있다. 이현과 문경에게도 사랑은 결코 구원이 되지 못했고, 죽음은 생의 필연적인 고통을 종식시키는 유일한 결말이었다.
혼란스러워하고 두려워하면서도 머뭇거리거나 주저하지 않고 내달렸던 그들이 닿은 마지막 역은 마치 당연한 귀결이라는 듯 무참한 죽음이었고, 해서 [물 속의 사막]은 부음을 듣고 영안실을 찾아간 문경의 친구 눈에 비친 두 사람의 죽음의 풍경으로 시작된다. 프롤로그에서 에필로그까지 이어지는 열두 개의 이야기들은 이현과 문경의 과거와 현재, 그들의 소소한 일상과 빛나는 이상, 그 속에서 불살라지는 정염과 고통에 관한 슬픈 협주곡이다.
어느덧 신예의 타이틀을 벗고 명백히 중진으로 접어든 여성 작가 김이정은 연륜만큼 깊어진 시선으로 범속하나 아름다운 사랑, 누구나 느끼지만 아무도 어쩔 수 없는 생의 부질없음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드는데 주변을 배회하며 중심을 탐색하는 듯한 그 문체가 익숙하면서도 어딘지 낯설고 매우 흡인력이 있다.
비약적인 전개나 충격적인 사건, 매력적인 경구 등 자극적인 소설적 장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짧지 않은 작품이 쉼표나 도돌이표를 찍을 필요 없이 끝까지 단번에 읽히는 힘은 무엇보다 씹을수록 깊은 맛이 우러나는 문체와 아무것도 섣불리 단정하거나 쉬이 간과하지 않는 작가의 성숙한 시선에 있다. 어떤 문학 작품이 그렇지 않겠느냐만 김이정의 [물 속의 사막]은 특히 공들여 씌어진 장편소설이다. 작가는 이 책을 내놓으며 말했다.
“갓 낳은 자식은 여기저기가 비틀어져 있고 뼈조차 제대로 맞춰져 있질 않은 병신이었다. 나는 선천성 기형인 그 자식을 한동안 골방 구석에 처박아놓고 못 본 체했다. 그리고 나는 햇살 눈부신 세상 밖으로 나가 한없이 놀았다. 그렇게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 골방 구석에 처박힌 놈이 잊혀지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다시 골방으로 가 그놈을 꺼내 처음으로, 똑바로 쳐다보았다. 여전히 외면하고 싶은 병신 자식이었다. 한때, 으슥한 밤이 되면 먼 동네로 가 낯선 집 앞에 몰래 갖다버리리라 마음먹었던 그놈이 갑자기 한없이 가여워졌다. 아니 가엾은 것은 그놈이 아니라 바로 내 자신이었다.
그 오랜 시간은 그런 내 자신을 인정하는 기간이었다. 무지하고 재능 없는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일. 나는 뼈아프게, 오랜 시간에 걸쳐 그걸 인정했다. 그리고 그것만이 내가 멈춰서 있는 그곳에서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는 힘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또한 글쓰기는, 문학은, 그렇게 한 발씩, 자기를 부정하면서, 온몸으로 걸어가는 길이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