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문학>으로 문단에 데뷔한 중견 작가의 장편소설. 축축한 어둠과 함께 흐드러지게 피어난 밤꽃들이 육감적인 추파를 던지며 골목길을 지나가는 남자들을 유혹했다. 그때 명순이가 꺽지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사창가에서 도망쳤던 꺽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굴었다. 돈 푼 깨나 있는 듯한 중년의 사내가 꺽지를 찾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중년의 사내는 지칠 줄 모르고 꺽지를 안았다. 꺽지가 중년의 사내를 밀치고 밖으로 나오자 수완이 문밖에 서 있는데…폭풍 같은 시대를 의리와 우정으로 살았던 양동 쪽방 사람들의 이야기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전3권)
김중태
1980년 『현대문학』에 「이주민」이 추천되어 문단에 데뷔하였다. 작품은 주로 인간의 몰락과 병든 사회 저변에 불행하게 소외된 사람들(연작장편 『쫓겨나는 사람들』, 『겨울 나비』, 『당신들의 축제』, 『태양은 지지 않는다』), 도시의 비정한 생존관계를 충격적이고 밀도 있게 묘사한 (『새와 유령』, 『겨울 신화』), 민족분단의 비극을 뛰어넘어 하나된 화합의 길을 여는 『장벽』과 『설촌별곡』, 『기적』등 뛰어난 수작을 발표하였다
『꺽지』의 무대는 천대받는 삶의 현장이자 생존의 밑바닥이었던 서울 역전의 양동골목. 배경 시대는 전쟁 직후 등장인물은 양동 똥치골목에서 악다구니를 하며 몸을 파는 창녀들과 약빠른 포주, 그들에게 기생하면서 도둑질을 하는 깡패 양아치들, 공인된 폭력을 앞세워 이들을 유린하는 노회한 부패 경찰들 등이 중심이다. 실제 그들의 삶을 지켜보았던 장본인으로서 작가는 극한 상황에 처한 인간들의 실존을 관찰하였고, 가식 없이 진실한 그들의 모습을 전달하고자 했다.
『꺽지』에는 당시 양동골목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비롯한 생활상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묘사되어 있다. 많은 부분 작가의 기억과 추억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서 거의 실제의 기록과 다름없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드라마틱한 감동과 생동감을 부여하는 것은, 작은 불씨를 살려내는 듯한 작가의 소설가적 역량 덕이다. 옆에서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는 듯 친근하고 소탈 한 문체, 그리고 특유의 해박한 고유어로써 구성지게 풀어놓는 입담은 졸깃한 읽는 맛을 부여한다.
양동골목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이야기는 ‘꺽지’라는 별명을 가진 창녀의 인생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우리나라 산천에 사는 생명력 강한 물고기인 ‘꺽지’는 험한 역경에도 꿋꿋이 살아낸 그녀의 삶 혹은 양동골목에서 함께 울고 웃었던 동료들의 삶을 상징한다. 이 책을 통해 양동골목이 눈에 보이는 듯 세밀히 묘사되고 있다.
비좁은 골목길변의 천막지붕집들, 다닥다닥 붙은 좁은 쪽방들과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공동 화장실이 있는 이곳의 주된 풍경은, 창녀들이 욕지거리과 함께 화대를 떼어먹은 손님과 드잡이를 하거나 기둥서방인 건달에게 두들겨맞는 모습, 정이 붙은 손님을 따라 살림을 나갔다가 되돌아오는 모습이 있고, 넝마통을 걸메고 기웃거리는 양아치들, 기둥서방으로 자처하는 건달들의 행패, 기습 단속한 경찰들과의 숨바꼭질 등을 많이 볼 수 있다.
창녀들을 찾는 손님(남자)들의 인물 유형 또한 다양하다. 전쟁터에서 살아 돌아왔으나 아내를 잃은 군인, 영화관에서 간판그림을 그리는 가난한 화가, 낭만적인 예술가, 회의적인 지식인 등 창녀의 눈을 통해 당시 남자들의 다양한 사상과 시대의식을 보여준다. 더욱이 꺽지를 사랑하는 깡패 수완은 단지 돈을 벌기 위해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학생들을 제압하는 정치 깡패 역을 기꺼이 도맡는다. 그런 수완의 행동을 비난하는 꺽지는 부정한 세상을 똑바로 볼 수 있는 현명한 여자로서, 그릇된 가치관이 난무하는 세상을 비판한다.
그러나 작가의 초점은 ‘사상’보다는 ‘인간’이었다. 사회로부터 유리된 채 인간 취급도 못 받는 이들에게도 뜨거운 심장과 눈물과 피가 있음을, 오히려 양심을 저버린 부패한 지식인보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가진 자들임을 보여준다. 누추한 곳에서 몸을 팔고 주먹을 팔고 쓰레기를 줍는 사람들이지만 서로의 아픔을 함께할 줄 아는 사람들이야말로 참되다는 진실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다.
실제 같은 소설, 소설 같은 실제. 주인공 꺽지를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실제의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또한 그 당시 양동골목에서 일어났던 실제의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작가 김중태의 일생 중 한 부분을 차지하는 양동골목에서의 기억이 소설로써 재편집되어 탄생한 것이다. 사실의 사건과 실제 인물의 삶을 토대로 했기에 『꺽지』의 이야기는 사실적이며 생생하다. 양동골목 화재사건과 애국청년단에 연루된 깡패들의 활약, 이승만 정권에 대항하는 학생들과 시민의 분위기 등을 배경으로 하여 초라한 양동골목, 창녀들의 개성적인 면면, 그들을 찾는 손님들의 유형과 사상, 당시 양아치와 건달들의 실상 등이 묘사되어 역사적 사건 뒤에 가리워져 있던 개개인의, 밑바닥 인생이 리얼하게 담겨졌다.
작가는 새삼스레 시대적 아픔을 회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극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의 인간 또는 그들의 삶을 얘기하고자 한다. 절대적 생존만이 인생의 전부였던 양동사람들에게 가해진 거부할 수 없는 운명, 순수하고 소박했던 그들에게 뻗친 부정한 유혹의 손길, 그것을 낙천적으로 소화하는 그들의 삶을 통해 실제의 삶에 근접한 진실을 보여주는 데 초점을 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