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년 전 T와 헤어졌다. T는 그사이 차를 샀고 최근 사업을 시작했다. 시를 쓰는 나는 T의 부탁으로 일산에 있다는 음악가를 만나러 간다. 나와 만나지 않는 동안 T는 이름도 말투도 바꿨다. 나를 ‘언니’라고 부르며 음악가 앞에서 호들갑을 떠는 T. 음악가가 레슨을 마치고 고깃집에서 식사를 하며 T는 음악가에게 ‘퍼브 한’ 무언가를 도와달라고 한다. 자신에게 한 것처럼. 쓰리를 잘 당하던 T, 명함에 ‘덧댄’ 이름을 바꾼 T, 음반기획사니 케이블 TV니 인터넷 사이트니 거짓말만 하는 T. 나는 그런 T를 떠나지 못하고 서울로 가는 T의 차를 탄다. T가 빠져나간 자리를 고스란히 보존하던 나는 여전히 내가 ‘나쁜 패’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권여선
저자 : 권여선
19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등단.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내 정원의 붉은 열매》 《비자나무숲》 《안녕 주정뱅이》, 장편소설로 《레가토》 《토우의 집》 등이 있다. 이상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한국일보문학상, 동리문학상, 동인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