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음과모음 계간지 2026 가을
| 저자 | 자음과모음 편집부 |
| 저자2 | |
| 출판사 | 자음과모음 |
| 발행일 | 2026-09-01 |
| 사양 | 496쪽 |
| ISBN | 2005-2340 (63) |
| 분야 | 국내도서 > 계간지 > 문학 |
| 정가 | 18,000원 |
B급 마이너 소수 취향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주류로 떠오른 ‘오컬트’. 『자음과모음』 2026 가을호 [크리티카]는 ‘우리가 왜 지금 오컬트에 주목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함께 한국의 오컬트가 가진 새로운 사유를 보여준다.
[작가]에서는 최근 『우리가 보지 않았던 장면들』을 출간한 임솔아 작가를 다룬다. 계절의 시와 소설을 깊이 있게 읽어내는 [시소]와 편집위원들이 리뷰하는 [독: 여름의 책] 코너도 풍성한 읽을거리로 채웠다. 언제나 좋은 작가와 작품이 함께하는 [창작] 코너 역시 시‧단편‧장편 연재로 독자들을 찾아간다. 제16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제3회 네오픽션 YA! 장르문학상 수상작을 발표한다.
오컬트의 시대: 임영주, 조현설, 정기현, 최다영
『자음과모음』 2026 가을호 크리티카의 주제는 ‘오컬트의 시대’이다. 여름이면 몰래몰래 찾아보게 되는 〈전설의 고향〉의 소복 입은 여자 귀신, 〈13일의 금요일〉의 프레디는 오랫동안 드문드문 사랑받았으나, B급 마이너 소수 취향이라 일컬어졌다.
2026년 지금 오컬트는 한국 대중문화의 주류다. 심지어 K-접두어를 붙여도 될 만큼 전 세계의 주류다. 극장과 OTT, 웹소설·웹툰, 숏폼 영상, 예능, 다큐까지 대한민국 콘텐츠는 귀신이 장악했다고 할 만하다. 웹소설·웹툰의 주인공은 기본적으로 빙의 귀신이고, 죽여도 죽지 않는 시체인 좀비는 조선인이다. 무속인들은 이제 방송에 나와 누가 미래를 잘 맞히나 경쟁도 하고 상금도 받는다. 이 시대의 오컬트는 각각 장르라는 틀을 벗어 각각의 콘텐츠에서 다양하게 존재한다. 논리적인 듯 논리적인 않은 그것, 보이는 듯 보이지 않는 이 소재는 어둠에서, 마이너로 머무르지 않고,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여, 세상 곳곳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오컬트에 주목한 것은 그저 이게 이 시대의 유행이어서만은 아니다. 유행은 지나간다. 그렇다면 왜 지금인가. 두 가지로 답할 수 있다.
하나는 익숙한 대답이다. 팬데믹, 기후 재난, 되풀이되는 참사와 따라잡기 어려운 속도로 바뀌는 기술. 설명의 체계가 삶의 규모를 감당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다른 언어를 찾는다. 유진 새커는 『이 행성의 먼지 속에서』에서 세계가 점점 더 사유 불가능해지고 있다고 썼다. 그에게 공포는 괴물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려는 역설적 시도이며, 따라서 정동이 아니라 인식론적 사건이다. 그의 책이 ‘공포의 철학’이 아니라 ‘철학의 공포’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공포는 철학이 설명하는 대상이 아니라 철학이 제 한계에 부딪히는 자리다.
다른 하나는 이 특집이 더 중요하게 여기는 대답이다. 지금 흔들리는 것은 오컬트가 아니라 그것을 가둬두던 기준이다. 굿은 미신이고 텔레비전 앞에서 숟가락을 구부리는 일은 과학이던 시절의 구분선이 이제는 잘 보이지 않는다. 점술은 오랫동안 보이지 않는 힘으로 미래를 읽는다는 이유로 미신이라 불렸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추천 알고리즘’ ‘생성형 인공지능’ ‘신용등급평가’는 같은 일을 하지만 미신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오컬트의 귀환이라기보다, 무엇을 이상한 것이라 부를지 정해온 근대의 기준이 예전만큼 분명하게 작동하지 않는 장면에 가깝다. 여기서 오컬트를 사유하는 흐름이 여러 갈래로 갈린다. 서구식 사고방식의 한쪽에서 오컬트가 사유하는 인간이 없어진 것의 세계, 붕괴된 사유의 세계 = 인간 없음 세계여서 절망 세계관이라면, 다른 쪽에서 오컬트는 인간의 의도 없이 스스로 작동하는 기계 같은 세계관을 상징한다. 반면 한국의 오컬트는 이 세계관과는 또 다른 사유를 보여준다. 우리가 이번 호에 다양한 필자의 글로 크리티카를 꾸린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대에 부응하듯, 이번 호 크리티카는 다양한 ‘오컬트’ 진단의 글들이 실렸다.
2026 가을, 자음과모음이 선택한 이야기
2026년 가을호 [창작]란 역시 풍성하다. 강상헌, 강성은, 김남주, 정현우, 조시현, 진은영, 최재원의 시와 강보라, 돌기민, 손원평, 황시운의 단편소설이 실렸다. 장편 연재는 최재영의 『오발 청년』이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친다.
End, 차라리, And: ‘굳이’의 문법, 임솔아
[작가] 코너의 주인공은 소설가 ‘임솔아’다. 민가경 평론가는 임솔아의 시와 소설을 나란히 읽으며, “이후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는 끝”에 접속사를 잇대려는 인물들의 태도를 ‘굳이’의 문법이라 명명한다. “End가 좀처럼 최종적인 마침표를 찍지 못하는 세계에서 And를 만들어내는” 혹은 “And를 놓아두는” 문장의 세계라고 보는 관점이 임솔아 작가의 문장과 세계를 좀 더 섬세하게 읽어내도록 이끈다. 임솔아 작가는 에세이에서 이웃 학교 친구 K의 죽음 앞에서 “일기로 쓸 일이 아니라는 것만 어렴풋이 알았 다”는 고백으로 소설 쓰기의 기원을 더듬는다. “말해질 수 없었던 것들은 소설이 되었다”는 작가의 에세이는 ‘End’와 ‘And’의 가치, 조금씩 다르게 살아내는 것을 알려준다.
계절을 함께하는 이야기: [시소]와 [독: 여름의 책]
『자음과모음』만의 계간평 [시소]는 봄, 가을에 새로운 필진을 선보인다. 가을-겨울, 두 계절의 이야기를 나눠줄 필자로 ‘시’ 부문은 윤은성 시인과 이희우 문학평론가가, ‘소설’은 노태훈 문학평론가와 이동휘 편집자가 참여했다. 시 지면에서는 시와 정치적 참여의 관계를, 소설 지면에서는 문학의 ‘양’과 ‘재미’를 화두로 삼아 한 계절의 작품들을 함께 읽는다.
본지 편집위원이 함께하는 [독: 여름의 책]에서는 이번에도 다섯 편의 리뷰를 준비했다. 편집위원들은 리뷰를 쓰는 동안 과거에는 열심히 문학을 읽었으나 지금은 잠시 멀어진 독자, 누구보다도 먼저 신인 작가와 단편소설을 찾아 읽는 열혈 독자,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책만 읽는 독자, 베스트셀러만 읽는 독자 등 다양한 독자를 찾아 헤맸다. 리뷰를 통해 그런 독자들이 이 잡지로 소환되길 바란다.
제16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제3회 네오픽션 YA! 장르문학상 발표
마지막으로 이번 호에 〈제16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제3회 네오픽션 YA! 장르문학상〉 수상작이 발표되었다. 장도은 작가 『극소 확률 사건』으로 김서린 작가가 『채비록—당신의 불행을 삽니다』로 상을 수상하였다. 좀처럼 일어나지 않을 일과 무언가를 갖추어 맞이하는 일, 그 제목들이 예고하는 세계를 곧 책으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하며 기다린다.
머리글
배주영 오컬트의 시대
크리티카: 오컬트의 시대
임영주 귀신이 어쩌다 오컬트가 되었나
조현설 한국 설화와 K-오컬트의 접점에 대한 단상
정기현 편안하고 또, 자유로워요……—오컬트 문학이 선사하는 감각 파헤치기
최다영 오컬트 테크놀로지: 실행 코드로서의 시와 기계 신성—신해욱과 송승언 시의 재귀성
시
강상헌 허튼소리 외 1편
강성은 다 큰 애들이 집집마다 외 1편
김남주 레다와 백조 외 1편
정현우 프렉 외 1편
조시현 화로 외 1편
진은영 작은 바늘 외 1편
최재원 새 들어 사네 외 1편
단편
강보라 헛돌
돌기민 양품 찾기
손원평 기울기
황시운 봉수 씨의 파라다이스
문학상 발표
제16회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상
제3회 네오픽션 YA! 장르문학상
장편
최재영 오발 청년 (3)
작가: 임솔아
민가경 작가론: End, 차라리, And—임솔아론
임솔아 에세이: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소
윤은성·이희우 뜻밖의 광장에서 선물을
노태훈·이동휘 문학의 재미, 독자의 자리
독: 여름의 책
김보경 영원한 현재라는 정글짐 안에서—구윤재, 『미래 아이 뜀틀』(문학과지성사, 2026)
노태훈 활극도 비극도 아닌—천명관, 『아코디언』(창비, 2026)
배주영 읽는 게임, 보는 괴담, 놀이형 스토리—《괴담에 떨어져도 출근을 해야 하는구나》(카카오페이지, 2024~)의 새로운 플랫폼형 웹소설
신예슬 믿음의 문제—데이비드 에이브럼, 『감각의 주술』(갈라파고스, 2026)
전청림 한 사람의 용기에 다가간다는 것—이미륵, 『압록강은 흐른다』(민음사,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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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존재와 의례를 질서의 안과 밖으로 가르는 일이 서구 근대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동아시아에도 무엇을 정당한 귀신과 의례로 인정할 것인지 판단하는 기준이 있었다. 다만 그 기준과 그것을 설명하는 언어는 달랐다. 주자에게 귀신은 개체가 아니라 만물이 생성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두 측면이었다. 돌아가 사라지는 쪽이 귀(鬼)이고, 펼쳐져 드러나는 쪽이 신(神)이었다. 조선의 성리학자들 역시 삶과 죽음, 제사와 감응을 이(理)와 기(氣)라는 하나의 세계 설명 안에서 논의했다. 서경덕은 사람과 귀신을 인간의 기가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으로 보았다. 이렇듯 감응의 방식을 둘러싼 설명은 서로 달랐지만, 귀신은 여전히 이와 기의 세계를 설명하는 언어 안에 있었다.
—임영주, 「귀신은 어쩌다 오컬트가 되었나」
K-오컬트는 외래종 식물이지만 적응기를 거쳐 근년에는 정착기로 접어든 것 같다. 근대 이전의 원귀 서사가 원한의 원천에 대한 조사와 공정한 심판을 통한 원한의 해소에 초점을 두었다면, 1920~1930년대의 근대적 미디어를 거치고, 해방 이후 서구문화의 영향을 받으면서 오컬트로 과하게 기울어져간 귓것들의 이미지 서사는 공포물로 달려갔다. 시청각적 자극을 통해 심리적 스릴에 몰두케 함으로써 카타르시스를 유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근대사회와 미디어의 변화에 따른 자연스러운 추이라고 할 만한 것이지만 한국 서사의 전통과의 사이에는 큰 장벽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한국 설화와 오컬트의 만남은 본래 어긋난 것이었으나 근래에는 이 어긋남이 조정되는 징후가 나타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조현설, 「한국 설화와 K-오컬트의 접점에 대한 단상」
문학에 본질이라 일컬을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오컬트 문학 에도 본질이라 칭하는 것이 가능한 ‘내재적원리’가 있지 않을까? 오컬트 문학 전체를 망라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오컬트 문학을 아주 조금 정도는 구성하고 있는 내재적원리 말이다. 일단 이 내재적 원리의 존재를 인정하고 나면, 내가 읽어야만 하는 책들이 산적해 있는 와중에도 늘 책임과 의무와는 관계없이 오컬트 문학을 집어 들게 되고, 그 안에서 매번 모종의 아늑함을 느끼는 이유를 이렇게도 설명해볼 수 있겠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오컬트 문학의 내재적 원리에 이끌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렇다면 그동안 읽어온 오컬트 문학 작품들에 공통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내재적원리를 탐구해보자. 그로부터 아늑함의 정체에 대한 실마리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니.
—정기현, 「편안하고 또, 자유로워요……—오컬트 문학이 선사하는 감각 파헤치기」
최진영의 소설은 문학과 사회, 삶과 죽음, 고통과 희망을 어느 한쪽으로 환원하거나 일방적으로 낙관하지 않은 채, 존재론적 고통, 관계의 윤리, 사회적 폭력과 치유의 문제에 천착하면서 서사의 윤리적 지평을 끈질기게 확장해나간다. 존재론적 고통에 관해서도 그는 고통을 단순한 서사적 소재나 정동의 장식으로 소비하지 않고, ‘소멸된(될) 미래’에 대한 책임을 현재의 주체가 어떻게 감당해야 하며 아포칼립스적 현재를 어떻게 견뎌낼 것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답을 구하는 서사적 장치를 구축한다. 특히 그의 작품이 오롯이 고통과 상처의 존재들에 집중하는 것은, 문학이 구조적으로 주변화된 이들의 편에 서서 그들의 목소리를 공적 영역으로 호출하려는 실천이라는 점을 분명히 보여준다. 이때 최진영의 서사는 소수자의 고통을 전시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고통이 발생·지속하는 사회적 조건과 구조를 파고들며, 문학이 어떻게 재난과 폭력의 시대에 여전히 윤리적 감응의 공간이 될 수 있는지를 탐색한다.
—염선옥, 「‘나’들의 죽음·삶과 윤리로의 나들이」
송승언과 신해욱의 시는 지배 규칙이 자율적으로 가동되며 새로운 실재를 창출하는 ‘실행 코드로서의 시’를 대표한다. 두 시는 재귀적 반복이라는 점에서 같은 원리를 공유하지만, 그 재귀가 작동하는 축은 서로 다르다. 송승언의 시에서 재귀적 반복은 신-기계-체제라는 계보를 따라 순차적으로 전개된다. 이는 하나의 규칙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단계별로 반복 호출되는 방식에 가깝다. 반면 신해욱의 시에서 그 재귀는 자기 유사성은 시스템-가이드-상태 창-아바타라는 위계를 따라 공간적으로 중첩된다.
—최다영, 「오컬트 테크놀로지: 실행 코드로서의 시와 기계 신성—신해욱과 송승언 시의 재귀성」
때로는 타인의 자리를 침범하면서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돌봄의 몫을 ‘굳이’ 고수하고, ‘굳이’ 돕는 역할을 자처하는 임솔아의 인물들을 조금 더 살펴보자. 어떤 면에서 그들은 어긋난 시간 감각에 휩쓸려 함께 어긋나버리기보다, 애써 자신의 입장을 붙든 채 반듯이 서 있으려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일상적 용례에서 ‘굳이’는 불필요해 보이는 선택을 지적하거나 냉소적으로 평가할 때 자주 쓰일 것이다. 그러나 임솔아의 인물들에게 ‘굳이’는 때로 열과 성을 다해 수행되기도, 때로 고요하고 산뜻하게 고수되는 하나의 문법이자 신념으로 등장한다.
―민가경, 「End, 차라리, And」―임솔아론

